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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중심! 연천)) 천년 사직의 마지막 왕을 만나러... 신라경순왕릉

왕마구리 2010. 8. 6. 12:54

이번 탐방은 경기DMZ트레킹 연천지역 3개 코스를 걷기 위해 연천군 문화관광과에 연천군 트레킹코스 안내 리플렛과 관광안내도를 신청하였는데 신청 5일만에 우편으로 집에 도착하여 그 내용들을 검토하다가 트레킹 코스 주변에 많은 유적지와 관광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월 31일(토) 첫 연천 제1코스(황포돛배~숭의전)를 걸으면서 인근에 있는 유적지와 관광지를 찾을 계획이었으나 정규 도보코스의 거리가 접근거리 포함 약 24km에 달해 트레킹 코스에서 벗어나 4~5km 이상 떨어진 곳(경순왕릉과 연천호로고루)에 위치한 유적지를 추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포기를 하게 되었다. 또한 정규 코스 종착지에 포함된 숭의전도 개관시간(오전10시~오후5시)에 맞추지 못해 탐방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경기DMZ트레킹 연천 제1코스의 숭의전과 다음에 탐방 예정인 연천 제2코스(숭의전~군남홍수조절지)에 포함된 고구려 유적지인 연천당포성과 강의 침식작용에 의해 생성된 임진강 주상절리 등을 별도로 미리 방문하여 탐방함으로서 다음에 걷게 될 제2코스의 소요시간을 줄여 볼 예정으로 승용차를 이용하여 이번 탐방을 실시하였다.

 

이번 탐방은 임진강 주변에 산재해 있는 유적지를 위주로 실시하였으며 고구려3대성의 하나인 은대리성만 한탄강을 끼고 위치해 있었다.

탐방기는 각 유적지별 나누어 게제를 하기로 한다.(유적지명을 클릭하면 바로 연결됨)

 

- 고구려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연천 고구려3대성(Ⅰ) 연천호로고루

- 고구려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연천 고구려3대성(Ⅱ) 연천당포성

- 고구려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연천 고구려3대성(Ⅲ) 연천은대리성

- 고려를 만나다! 숭의전

- 천년 사직의 마지막 왕을 만나러... 신라경순왕릉

- 천혜의 자연성벽! 임진강 주상절리

 

【 탐방경로 】 신라경순왕릉/장단고랑포→연천호로고루→숭의전→연천당포성→임진강 주상절리→연천은대리성

【 탐방일자 】2010년 8월 2일(월)

소요시간 】 총 5시간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신라경순왕릉(新羅敬順王陵) ▶

◁ 죽어서도 고향 경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객지에 묻혀야 했던 비운의 신라 마지막 왕을 찾아서... ▷  

 

▲ 경순왕릉 전체 전경

 

연천군의 임진강변 유적지 탐방의 첫번째 목적지이다.

신라의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지역을 벗어나 있는 능으로 신라 천년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준 비운의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으로 죽어서도 고려조정의 '왕의 구는 송도에서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고향인 경주에 묻히지 못하고 이곳에 장례를 치루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 번영을 누리던 임진강 장단 고랑포구가 내려다 보이는 나지막한 성거산 기슭에 모셔진 경순왕릉은 연천군의 고구려3대성 중 하나인 연천호로고루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신라에 있는 여러 왕릉과는 규모와 양식이 다른 조선시대 사대부의 묘와 비슷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능 입구에 설치된 홍살문이나 능 앞의 정자각, 능 주변의 문,무관석인 등이 없어, 조선시대에 재정비하였지만 왕릉으로서의 격을 인정받지 못한 문중 묘의 성격을 지닌 전형적인 조선시대 사대부의 묘로 조성되었다.

978년 경순왕이 세상을 떠난 후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었다가 769년이 지난 1747년 후손들에 의해 묘지석이 발견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니 처음의 경순왕릉의 모습을 추측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의 시조 태조 왕건과 세 분의 고려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인 숭의전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과 불과 약 17km 떨어진 동일 지역내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기이한 인연으로 생각이 들었다.

 

 

 

 

▲ 경순왕릉 입구와 입구에서 뒤돌아본 왕릉가는 길 

▲ 능묘 배치도 

 

【 경순왕릉(敬順王陵) 】

*사적 제244호(1975년 6월 25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번지

 

▷ 경순왕(敬順王)

제56대 신라의 마지막 왕(재위 927~935)으로 성은 김,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문성왕의 후손으로 927년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후백제, 고려, 신라의 후삼국시대로 특히 후백제의 잦은 침입과 각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다. 이에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935년 10월 마지막 화백회의를 열어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하들과 큰아들 태자 일(鎰), 마지막 왕자(季子) 황(徨)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후 태자 일은 죽방모후와 처자를 데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며서 보냈다고 하여 후일 마의태자라고 불리게 되었고, 계자 황은 속세에 처자를 두고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명 범공으로 해인사에서 기거하였다고 한다.

고려에 나라를 귀부한 경순왕은 태자보다 높은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업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귀부한지 43년 후인 고려 경종3년(978)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접한 신라 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경주에 장례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고려조정에서 '왕의 구(柩)는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하여 장단부 고랑포리 성거산에 왕의 예로 장례를 모셨다.

 

 

▷ 경순왕릉의 내력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있는 릉으로 고랑포 나루터 뒤편의 남방항계선과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부 쪽에 단독으로 위치하고 있다.

경순왕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졌던 것을 조선 영조23년(1747) 후손(나주김씨)들이 왕릉 주변에서 묘지석을 발견함으로서 되찾게 되었다. 따라서 경순왕릉은 조선후기의 양식으로 재정비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례가 행해지고 있다.

경순왕릉 주변에는 1986년 건립된 정면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재실 건물과 경순왕릉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가 비각 안에 놓여있다.

 

▲ 경순왕릉의 재실

 

  * 경순왕릉 능표(陵表) 

 

     능표의 전면에는 '신라경순왕지능(新羅敬順王之陵)'이라는 7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5행의 87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왕은 신라 제56대 왕으로 후당 천성2년 무자(927년)에 경애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셨고,

      청태 을미년(935년)에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셨다.

      송 태평흥국 무인년(978년), 즉 고려 경종3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는 경순이라 하고

      왕의 예로 장단 남쪽 고부 8리 계좌 방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영조의 존호) 성상23년 정묘년(1747년) 월 일에 다시 세우다.

 

  *경순왕릉의 격식

 

 

    전체적인 형태는 조선후기 사대부 묘소의 전형적인 격식을 보이고 있으며 왕릉의 강이 조성되어 있을 뿐 주변의 석물들은 모주 조선 영조때 만든 것이다.

    능상(陵上, 왕의 무덤으로 봉분)은 원형으로 32매의 호석(護石, 능상 주위를 두른 것으로 사대석 또는 병풍석이라고도 하며 봉분 침하와 해충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설치)과 장방형의 곡장(曲墻, 능을 보호하기 위해 능 주위로 동서북 세면을 둘러쌓은 담장)을 두르고 있으며, 능의 전면에는 2단의 계체석을 갖추고 있다.

    상단 계체석 위에는 능상 앞으로 능표와 상석이 놓여져 있다.

    중단에는 네 면에 사각 화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長明燈, 일반적으로 돌아가신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덤 앞에 세움)이 직선상에 놓여져 있고, 장명등 좌우에는 석양(石羊, 능 주인의 명복을 빌고 귀신이나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역할)과 망주석(望柱石, 먼 곳에서 능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는 표지로서 영혼이 자기의 유택(능)을 찾아 오게 하는 안내 역할)이 하나씩 서있다.

    곡장과 호석은 형식과 문양의 형태로 보아 일제강점기인 1932년 보수를 하면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 경순왕릉 신도비 

 

 

경순왕릉 주변에는 경순왕릉 신도비라고 전해지는 대리석재의 비석이 비각안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 고랑포구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것으로 1976년 고랑포초등학교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영조24년(1748) 후손들이 발견한 신도비로 추정하여 1986년 비각을 짓고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비의 마모상태가 심하여 현재 한쪽 면에서만 몇 개의 문자만 판독될 정도여서 내용은 전혀 알 수 없다.

비석의 건립연대는 모르지만 비석의 형태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 왕릉 입구의 임진강과 고랑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