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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탐방 시리즈(1) 창경궁(昌慶宮)

왕마구리 2010. 11. 12. 16:40

◀ 왕실 이야기 듣는 창경궁(昌慶宮) ▶ 

 

600여년 전에 개국한 조선 왕조는 서울을 수도로 정하였는데, 서울은 수려한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강과 하천이 흘러 사람이 생활하기에 편리하며,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적합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울을 수도로 정한 뒤에는 곧바로 궁궐을 짓고 종묘와 사직을 세웠으며, 도성과 성문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팔요한 시설들을 마련했다.

서울은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600년이 넘게 우리나라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현재 서울 도심에는 넓은 도로와 고층 빌딩이 가득하지만 백여년 전만 해도 서울은 왕실 가족이 거처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나하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통 도시였다. 최고의 인재와 물산이 궁궐과 왕실이 있는 서울로 모여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에는 품격있는 왕실 문화가 발달하였다.

궁궐은 나라 경영의 중추가 되는 소중한 장소였으며,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이 있다.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다. 이들 궁궐과 종묘는 한 나라를 상진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에 당대 최고의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창덕궁과 종묘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 왕조는 예의와 도덕을 숭상하며 이로써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검소함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기본 정신은 궁궐 건축에도 잘 드러나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고, 절제된 아름다움은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에서 만날 수 있는 미덕이다. 궁궐은 우리 역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자 왕과 왕실 사람들이 생활하며 희로애락을 담아낸 삶의 공간이다. 궁궐이 전하는 역사, 인물, 건축, 자연 등 숱한 이야기 속에는 우리 선조들이 오랜 역사와 삶 속에서 터득해낸 지혜와 슬기로움이 담겨 있다.

 

    

 

 

 

청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 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므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할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공간의 구조와 배치도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의 축을 이루도록 구획한 것이 아니라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며 터를 잡아 필요한 전각을 지었기에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도 언덕에 지어졌다.

창경궁의 또 다른 독특함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다. 남,서,북쪽은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풍부하게 전해온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사건이 일어난 현장인 창경궁에서 들어면 더 생생하게 들린다.

【 방문일자 】2010년 11월 2일(화)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4월~10월 09:00~18:00/11월, 3월 09:00~17:30/12월~2월 09:00~17:00(매주 월요일 휴궁)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청소년(7세~18세) \500

                  통합관람권 \10,000 : 4대궁(경복궁, 창덕궁<후원포함>,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 관람 가능

*교통안내 :

  - 지하철 : 혜화역(4호선) 4번출구 도보 10분

  - 버스 : 101번, 104번, 106번, 107번, 108번, 140번, 143번, 149번, 150번, 161번, 162번, 171번,172번, 272번, 301번, 1018번, 9410번(광역)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85

【 창경궁 탐방코스 】

선인문-매표소-홍화문(보물 제384호)-옥천교(보물 제386호)-명정문 및 행각(보물 제385호)-명정전(국보 제226호)-숭문당-문정전과 문정문-함인정-경춘전-통명전(보물 제818호)과 지당-양화당-풍기대(보물 제846호)-성종태실 및 비-춘당지 및 창경궁내 팔각칠층석탑(보물 제1119호)-대온실-영춘헌 및 집복헌-관천대(보물 제851호)-홍화문

 

 

 

【 창경궁 소개 】

- 창경궁의 역사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이다.

성종14년(1483)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군이다.

처음 지을 당시의 건물들은 정전인 명정전, 편전인 문정전, 침전인 수령전, 그리고 환경전, 경춘전, 인양전, 통명전, 양화당, 여휘당, 사성각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으로 조선시대 궁궐 중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광해군7년(1615)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1월에 마무리하였다.

창경궁 재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법궁이 됨에 따라 창덕궁과 인접한 관계로 조선 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 하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을 하였고,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 두었었다.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는데, 인조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일어나 건물의 변화가 생기고 여러 사건도 일어났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1909년 일본제국이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로 강제로 창경궁 내부 궁문과 담장, 그리고 많은 전각들을 훼손하고 궁안에 일본식 건물을 세우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조성하였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꾸었으며,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하였으며,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절단하고 도로를 내어 주변 환경을 파괴하였다.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밭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창경궁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동.식물원으로 쓰이다가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이 결정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다시 회복되었으며,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하였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 및 일본식 건물, 벚나무 등을 모두 철거하고 없어졌던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하였다.

장조, 정조, 순조, 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 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유적이다.

- 창경궁의 건축

창경궁의 위치한 곳 서쪽으로 창덕궁이 붙어있고 남쪽으로는 종묘와 통하며 조선시대 왕궁 가운데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남향을 하지 않고 동향을 한 이유는 이 둥이 별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지형상으로 동향이 적합하였던 듯하다. 현재 창경궁에는 조선시재 건물로는 국보 제226호 명정전, 보물 제818호 통명전, 보물 제384호 홍화문, 숭문당, 함인정, 환경전, 경춘전, 양화당, 집복헌, 영춘헌, 관덕정, 월근문, 선인문, 보물 제385호 명정문과 명정전 회랑이 있고, 석조물로는 보물 제386호 옥천교, 보물 제846호 풍기대, 보물 제851호 관천대, 보물 제1119호 경복궁내 팔각칠층석탑이 있다.

현 낙선재 지역은 원래 창경궁에 소속되었으나 지금은 창덕궁 경내에 있다.

창경궁의 정전은 명정전이고, 명정전의 출입문인 명정문은 중문이며, 궁궐의 정문은 홍화문이다. 홍화문 좌.우에는 익각이 있고, 홍화문을 들어서면 앞을 가로지르는 옥천에 옥천교가 있다. 이 다리를 지나면 바로 명정문이 나오는데, 창경궁은 경복궁의 흥례문, 창덕궁의 진선문에 해당하는 문이 없어 홍화문에서 바로 명정문으로 들어가도록 구성된 점에서 다른 규모에 비해 규모가 작고 격식이 떨어진다.

창경궁의 중심 건물인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은 중심축에 맞추어 놓여 있으나, 지형을 살려 건물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좌우 대칭을 이루지 않고, 주변 행각도 이에 맞추어 약간 틀어져 있다.

- 창경궁의 연표

* 세종원년(1418) : 상왕전(태종)으로 수강전 창건

* 성종14년(1483) : 수강궁 터에 창경궁 창건

* 선조25년(1592) : 임진왜란으로 소실

* 광해군8년(1616) : 창경궁 중건

* 인조원년(1623) : 인조반정으로 동궁인 저승전과 내전 일대 소실

* 인조2년(1624) :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 양화당 등 소실

* 인조11년(1633) : 통명전, 양화당 등 중건

* 정조1년(1777) : 자경전 건립

* 정조14년(1790) : 통명전 소실

* 순조30년(1830) : 환경전에서 발생한 화재로 내전 일대 소실

* 순조34년(1834) : 통명전, 환경전 등 소실된 전각 재건

* 철종8년(1857) : 선인문, 위장소, 주자소 등 60여 칸 소실

* 고종14년(1877) : 창경궁 수리

* 순종3년(1909) : 동,식물원 조성으로 궁궐 훼손

* 1911년 창경원으로 격하

* 1983년 창경궁으로 환원, 창경궁 복원 공사

 

【 창경궁의 문화재들 】

◎ 왕과 신하와 백성이 교감하는 - 외전(外展)

맑은 물 흐르듯, 바른 정치를 바라다!!!

왕실의 웃어른을 편안히 모시기 위한 궁궐로 지었기 때문에 정치 공간인 외전보다는 생활공간인 내전이 더 넓고 발달했다. 창경궁의 외전은 다른 궁궐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규모도 아담하다.

명정전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단층 지붕에 아담한 규모이지만, 궁궐의 정전 가운데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

명정전 주위에는 왕이 일상 업무를 보았던 문정전, 독서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숭문당이 자리 잡고 있다. 창경궁 외전이 전체적으로 동향한 것과 달리 문정전은 남향하고 있다.

왕의 혼례는 중요한 국가 행사 중 하나였다. 정전인 명정전에서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가례식이 치러지기도 했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가례식은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모든 궁궐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법천이 있는 궁궐의 안쪽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루어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길지가 되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낸 물길이다. 이를 '금천'이라 부른다.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 부르는데, 이 옥천에 놓인 다리가 옥천교이다. 나쁜 기운이 궁궐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옥천교 다리 양쪽 아치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을 새겼다.

옥천교는 모든 궁궐의 금천에 놓인 다리 가운데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앵두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등이 활짝 피는 옥천교 주변의 봄 풍광이 매우 화사하다. 조선시대 왕이 직접 백성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창경궁 홍화문 앞에서는 달랐다. 홍화문 앞에서 영조는 균역법에 대한 찬반여부를 백성에게 직접 물었거, 효심깊은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들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며 기쁨을 함께 했다.

 

♧ 창경궁 명정전(昌慶宮 明政殿)

*국보 제226호(1985년1월8일 지정)

 

  

▲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

 

▲ 명정전 뒷편(남측 면)의 내전으로 이어지는 행각

 

 

▲ 명정전 측면과 후면 모습

 

조선 성종15년(1484) 창경궁이 조성되면서 그 정전으로 세워졌다. 이곳은 임금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1544년 인조가 왕위에 즉위하는 등 국가적인 큰 행사를 거행하는 장소로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명정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다.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른 것이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8년(1616)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2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궁궐의 정전으로 작은 규모이다. 다른 궁의 정전과 같이 이중의 월대를 두고 그 위에 건물 기단을 마련하고, 큰 사각 주춧돌 위에 원형의 운두 높은 주좌를 조각하여 초석을 배열하였다.

월대의 형식은 다른 궁의 것과 달리 지형에 맞추어 전면 동쪽과 북쪽 일부만을 이중단으로 하고, 건물 좌우와 뒷편에서는 1단으로 하였다. 평면으로 보아 정면 5칸, 측면 3칸에 후퇴를 한 단층 팔작기와지붕으로 겹처마이다.

평주 위에는 모서리를 많이 굴린 창방이 놓이고 운두가 납은 평방 위에 다포계 양식의 외삼출목, 내삼출목의 공포를 짜았다. 건물 사면은 모두 꽃창살으로 돌려져 있는데, 그 위로는 교살창이 있다. 내부 바닥에는 전(塼 벽돌)을 깔았고, 뒤편 중앙부에는 왕좌인 용상이 있는데 그 뒤로 해와 달, 5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악도의 병풍이 놓였다.

 

 

▲ 명정전 내부 중앙부의 왕좌와 왕좌 상부 천장 모습

  

▲ 문정전 내부 천장과 꽃창살

 

그 위로는 닫집으로 짜인 보개가 있고, 천정의 중앙부에는 한층을 접어올린 쌍봉문이 있는 보개천정을 장식하였으며, 그 주위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을 하고, 특히 천정판에는 화려한 연화문의 반자초 단청을 시문하였다.

 

 

▲ 명정전 월대답도

 

월대의 전면에는 명정전 어전에 맞추어 중앙에 삼도의 이중계단이 놓였다. 가운데 어계의 폭은 2.4m이고, 양측 협계의 폭은 각 1.3m이다. 상하 계단은 모두 6단씩으로 어간의 답보 석판 중앙에 사분심엽형 윤곽을 양각한 후 그 안에 날개를 활짝 펼친 한쌍의 봉황을 조각해 장식했고, 챌판에도 당초와 보상화, 운문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하층 계단 앞에는 명정문과 연결되는 어도가 있고 좌우애 24개의 품계석이 있다.

명정전 남측의 문정전과 주변 행각은 1983년부터 3년간에 걸친 복원공사로 대부분 복원하였고,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지만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昌慶宮 明政門 및 行閣)

*보물 제385호(1963년1월21일 지정)

 

▲ 명정문전경과 후경

 

▲ 명정문 행각 내부 모습과 전면에서 바라본 명정문과 좌우로 연결된 행각

 

▲ 명정전 앞에서 뒤돌아본 북쪽(左)과 남쪽(右) 명정문 행각

 

 

성종15년(1484) 창경궁을 세울 때에 지은 것이지만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광해군 시절에 다시 지었다.

회랑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시대 때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인데, 2칸 규모로 기둥 윗부분에 새부리 모양으로 뻗어 나온 장식을 하였다.

명정문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건물 안쪽은 천장의 뼈대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정이지만 일부는 천장 속을 가리는 우물천정으로 꾸몄다.

건물의 짜임이 착실하고 알차서 조선 중기의 문을 대표할 만하고, 짜임새가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궁궐 중문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창경궁 문정전(昌慶宮 文政殿)

 

 

문정전은 창경궁 건립 때 편전으로 건립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명정전과 함께 중건하였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린 명정전 정면 사진에 동측면의 일부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이 전각이 존속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으나 그후의 자세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1984년부터 시행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건물의 기단과 동쪽에 두 곳, 서쪽 한 곳의 계단이 확인되었는데, 기단의 규모는 남북 20m, 동서 18m였다.

1986년 창경궁 중창공사 때 중건되었는데, 발굴조사와 문헌의 고증에 의하여 네모기둥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개삼출목, 외이출목, 단층 팔작집(38坪)으로 겹처마이며 남향하여 세웠다. 이 건물의 서쪽에서 숭문당 남쪽면으로는 경사진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남북 방향으로 아름다운 2단의 화계를 꾸몄고 동쪽 행각사이에는 문정문이 있다.

 

 

 

▲ 문정전 안내도

 

♧ 창경궁 숭문당(昌慶宮 崇文堂)

 

 

 

 

이 건물은 조선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순조30년(1830)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崇文堂'의 현판과 '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을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흩처마이며, 지형에 따라 앞면에만 방형의 장초석을 사용하여 누각처럼 세웠다. 기둥 위에는 간단한 초익공의 공포를 짜았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 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장식하였다.

평면으로 보아 전후와 남쪽에 퇴간을 두고 마루를 깔았으며, 가운데 칸의 마루와 동선을 연결시켰고 그 좌우에 방을 놓았다.

 

▲ 외전과 내전을 연결하는 빈양문과 숭문당

▲ 명정전 뒤에서 빈양문으로 연결되는 행각내부

 

<<빈양문>>

숭문당 북쪽에 연접되어 있는 이 문은 치조공간(외전)과 연조공간(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의 개폐 기능을 갖는 문으로 명정전의 뒷면 중앙 어칸 앞으로 설치된 복도를 따라가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내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북쪽으로 함인정, 경춘전, 환경전이 눈에 들어온다.

이 문은 '궁궐지'에 간단한 규모가 기록되어 있고, 1986년 중건 공사 때 발굴 조사를 토대로 재건하였다.

 

♧ 창경궁 옥천교(昌慶宮 玉川橋)

*보물 제386호

 

  

 

이 돌다리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금천인 옥류천을 가로 질러 있는 것으로 산천의 정기를 옮겨다 주는 명당수가 흐르는 곳이다. 명칭은 창경궁 내 건물 이름과 마찬가지로 당시 의정부 좌찬성이었던 서거정이 지은 것이다.

궁궐의 정전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정전의 정문과 궁궐대문 사이를 흐르게 한 금천을 건너게 되는데, 옥천교가 바로 금천 위의 다리로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의 대문인 명정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반원아치형태의 홍예 2개를 이어붙여 안정감이 느껴지며 아치 위에 장대석으로 귀틀을 짜고, 장대석과 판석을 끼워 넣어 바닥을 만들고, 양옆에 아름다운 돌난간을 세웠고 옥천교의 양끝에는 석수를 돌로 깎아 세웠으며, 이런 양식은 창덕궁의 금천교나 경복궁의 영제교와 같으며, 궁궐의 다리에 맞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홍예가 이어지는 공간에는 억센 표정을 하고 있는 도깨비얼굴을 새겨놓아 주의를 끄는데, 공간에 맞추려는 듯 이마가 넓고 턱이 좁아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다리의 양옆에 두어 이곳을 오가는 이들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다리 위의 중간부분이 무지개처럼 약간 둥그스름하며, 다리의 너비는 널찍하게 두었는데, 이는 임금님이 거동할 때 좌우를 옹위하는 의장대 행렬까지 고려한 것이다. 다리의 좌우로는 아름다운 난간을 세우고 양끝의 기둥 위에는 돌짐승을 둥글게 깎아 두었다.

궁궐 안의 다리인 만큼 각 부분의 양식과 조각이 특별하며, 특히 다른 궁궐릐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 이 다리만이 독립적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창경궁을 짓던 때와 연관 지어 조선 성종14년(1483)인 것으로 여겨진다.

 

♧ 창경궁 홍화문(昌慶宮 弘化門)

*보물 제384호(1963년1월21일 지정)

 

 

 

 

홍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15년(1484)에 지은 건물이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광해군8년(1616)에 다시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 홍화문의 귀공포와 추녀(上), 내부공포(中), 처마(下)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구고 있다.

여러 차례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은 잃었지만 창경궁, 창덕궁과 같은 건물과 함꼐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 왕실 여성의 친숙한 공간 - 내전(內展)

구중궁궐의 삶, 그 희노애락을 기억하다!!!

창경궁은 성종의 효심으로 탄생한 궁궐이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20세에 요절. 덕종으로 추존)의 둘째 아들로 작은 아버지인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창경궁은 왕실의 웃어른으로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 어머니인 덕종 비 소혜왕후, 작은어머니인 예종 비 안순왕후 등 세 분 대비를 모시기 된 성종이 이들을 위해 마련한 궁궐이다.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은 내전의 중심 공간으로 규모가 크다. 전각 옆에 돌난간을 두른 네모난 연지와 둥근 샘이 있으며, 뒤뜰에는 꽃계단이 마련되어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통명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영역에는 대비, 새자빈, 후궁들의 처소로 쓰인 여러 전각들이 모여 있다.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곳이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집복헌에서 정조는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아들 순조를 낳았고, 순조의 돌잔치를 열었다. 특히 잡복헌은 순조의 탄생, 돌잔치, 관례, 책례 등이 모두 이루어져 순조와 그 인연이 매우 깊다.

창경궁 내전은 이처럼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희로애락이 깃든 이야기를 풍부히 전해준다.

 

♧ 창경궁 통명전(昌慶宮 通明殿)과 지당(池塘)

*보물 제818호(1985년1월8일 지정

 

 

 

 

 

창경궁 안에 있는 왕의 생활공간으로 연회 장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조선 성종15년(1484) 처음 지었던 건물이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때 고쳐 지었으나 정조14년(1790)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34년(1834) 창경궁을 고쳐 세울 때 같이 세운 것이다.

건물 전면에는 정교하게 장대석으로 쌓은 규모가 큰 월대가 마련되었으며, 월대 정면에는 3조의 돌계단이 붙어 있으며, 좌,우측에도 각각 계단이 있고, 월대 상면에는 방형으로 다듬은 화강암 박석을 깔았다. 월대 위에 다시 장대석을 놓아 기단을 형성허여 그 위에 강회다짐을 하고 사각형 초석과 사각기둥을 세웠다.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인데, 정면 5칸, 측면 2칸을 감싸며 툇칸이 설치된 형식이다. 내부는 서북쪽 일부 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원래는 가운데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대청을 두고 대청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의 정면 중앙 3칸의 툇칸 부분은 개방하였고, 툇칸면 중앙 3칸은 사분합 들문을 달았고, 좌,우의 각 2칸에는 머름을 꾸미고 머름 위에 사분합창과 평창인 교창을 달았다.

 

▲ 통명전 내부의 현판과 천장 모습 

  

 

지붕 위는 이익공으로 결구하였고,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만 놓았다. 천장은 우물천정을 주조로 하되 부분적으로 고미반자를 사용하였다. 큰 부재들에는 모루단청을 하였고 우물천장의 청판에는 모란문양을 그려 넣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창덕궁 대조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이다.

지붕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두와 잡상 등을 배치했고, 사래에는 토수를 끼웠다. 건물 전면 좌,우 협칸 기단 위에는 아궁이를 설치했던 흔적이 있다.

<<지당(池塘)>>

 

  

 

 

통명전 서쪽에 화강석으로 아름답게 조성한 지당은 남북 길이 12.8m, 동서 길이 5.2m의 장방형 연못으로, 연못의 4벽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둘레에 돌난간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돌렸다. 지단 위에는 길이 5.94m, 폭 2.56m의 간결한 돌다리가 동서로 설치되어 있다.

이 지당의 물은 북쪽 4.6m 떨어진 샘에서 넘쳐나는 물을, 직선으로 설치한 석구를 통해 폭포로 떨어지도록 고안했다.

한국의 지당 가운데 가장 기발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평가받는다.

 

 

▲ 통명전(左)과 양화당(右) 전경과 안내도

 

♧ 창경궁 양화당(昌慶宮 養和堂)

 

 

  

▲ 양화당 전경

 

▲ 양화당의 창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내모기둥을 세우고 초익공계 포작을 짜았다. 기둥간에는 화반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간결한 장식을 하였다.

건물의 내부에는 좌우엔 온돌방과 중앙 3칸은 마루를 깔았고, 전면 중앙의 2칸에만 툇마루를 창 없이 개방하였다. 외진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는 퇴량을 걸었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대들보는 내진고주 사이에 걸리었다.

 

♧ 창경궁 경춘전(昌慶宮 景春殿)

 

 

 

 

 

창경궁의 내전으로 성종14년에 처음 건립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8년에 재건하였으나 순조30년에 다시 불타 순조34년(1834)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7칸, 전후퇴칸을 포함하여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네모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간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네면에는 모두 세살문을 달았고 그 위에 교살창을 하였다. 좌우엔 온돌방과 중앙 3칸은 마루를 깔았는데 양측으로 각 2칸과 전후퇴칸은 연등천정을 하고 우물천정을 하였다.

 

 

 

▲ 경춘전과 환경전 안내도

 

♧ 창경궁 환경전(昌慶宮 歡慶殿)

 

  

 

성종15년(1484)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광해군8년(1616)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30년(1830)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순조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승하했을 때는 빈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간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건물의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고, 외진평주와 내진고주를 배열하여 퇴량을 걸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대량은 내진고주 사이에 걸었다.

현재 보수공사(2010년 6월1일~11월27일) 중이다.

 

♧ 창경궁 함인정(昌慶宮 涵仁亭)

 

 

 

 

▲ 함인정 내부 게 방향으로 걸려있는 현판들

 

성종15년(1484)에 지은 인양전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자리에 인조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았고, 주간에는 화반 두 개씩을 놓았다.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내진주로 구획된 마루는 한 단 높게 처리하여 그 위로는 우물천장을 하고 사방둘레의 퇴간에는 연등천장을 하였다.

 

♧ 창경궁 영춘헌 및 집복헌(昌慶宮 迎春軒 및 集福軒)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핼각으로 초창 연대는 알 수 없다. 집복헌에서는 영조11년(1735)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정조14년(1790)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영춘헌에서 거처하다가 재위 24년(1800) 6월 승하하였다.

순조30년(1830) 8월1일 오전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 경춘전 등과 함께 소실되어 순조34년 장남궁을 헐어다 그 제목으로 재건하였다.

1983년 동물사 본관에 있던 창경원 관리사무소가 동물사의 철거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겨 임시 관리사무소로 사용되다가 1986년 중건 공사 때 창경궁 관리사무소를 신축하고 이 건물은 변형된 부분을 보수하였다.

영춘헌은 본채 5칸이 남향하여 一자형을 이루고 본채의 좌우와 뒷면으로는 행각이 둘러져 있어 口자형을 이루었으며 서쪽으로 口자형의 행각이 이어져 맞붙어 있다.

주위 건물과 비교해 볼 때 통명전, 경춘전, 환경전 등은 이익공식이고, 양화당은 초익공식인데 비하여 영춘헌은 기둥의 높이도 낮고 익공의 끝을 몰익공식으로 둥글게 굴려 초각하였으며 행각은 더욱 간결하게 굴도리집으로 처리하여 각 건물의 격을 엿볼 수 있다.

 

◎ 도시 새의 보금자리 - 춘당지(春塘池)

창경궁이 창경원, 다시 창경궁이 되기까지...

 

 

창경궁은 창덕궁과 별개의 공간이 아니었으므로 창덕궁의 후원을 함께 이용하였다. 현재 춘당지 주변이 창경궁의 후원처럼 여겨지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서면서 창경궁을 놀이 공간으로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본래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창덕궁 춘장대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지금의 소춘당지)이다.

지금의 춘당지에는 연산군이 서총대 앞 대지를 파다가 중종반정으로 중단된 곳으로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라는 논이 있었다.

 

 

 

 

일제가 1909년에 이를 파헤쳐서 큰 연못을 만들었는데 두 개의 연못으로 구성되며 위의 것이 1,107㎡, 아래의 것이 6,483㎡이다. 1983년 이후에 전통 양식의 연못으로 새롭게 조성하였으며 연못 속의 섬(366㎡)은 1986년에 조성한 것이 오늘날의 춘당지이다.

춘당지는 서울 도심에 흔치 않은 넓은 연못으로, 주변의 숲도 울창하여 많은 새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천연기념물인 원앙도 춘당지 주변에서 볼 수 있다.

 

 

 

▲ 춘당지 옆 낙엽밝기 코스의 가을 단풍

 

◎ 근대문화유산으로 만나는 대온실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대온실은 창덕궁에 거처하던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 하에 일본인들이 창덕궁과 인접한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함께 지은 것이다.

일본 황실 책임자이던 후쿠바가 설계하고 시공은 프랑스의 한 회사가 맡았는데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의 규모였으며,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하여, 희귀한 식물들을 전시하였다.

대온실의 연면적은 534.6㎡로 지붕의 목재부재와 창호의 창살은 햇살을 최대한 많이 받을 수 있도록 가늘게 하였고, 가로 세로 정방형의 단순함과 지루함을 덜어주고자 상부 창호의 창살을 반원이 있는 뾰족아치로 모양을 내고 지붕에는 조선황실의 상징문양인 오얏꽃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현재 대온실은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야생화, 자생식물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2004년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자생화를 심어 가꾼 '자생화단'과 더불어 궐내 자연 학습장이 되고 있다.

 

◎ 석조 문화재들

♧ 창경궁 풍기대(昌慶宮 風旗臺)

*보물 제846호(1985년8월9일 지정)

 

풍기대란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추정하는 깃발을 세운 대이다.

경복궁 풍기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 228cm이며, 하부 대석의 높이는 91cm, 넓이는 가로,세로 모두 62cm이다. 상부 팔각기둥은 높이 135cm, 상부구멍 지름은 11cm, 깊이가 33cm로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양각한 8각기둥을 세운 모양이다. 8각기둥 맨 위의 중앙에 깃대를 꼽는 구멍이 있고, 그 아래 기둥 옆으로 배수 구멍이 뚫려 있다.

풍기대에 '상풍간(相風竿)'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깃대의 길이는 확실하지 않으며 깃대 끝에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잴 수 있었다. 풍향은 24방향으로 표시하고 풍속은 그 강도에 따라 8단계 정도로 분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풍향의 측정은 농업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관측 자료로 세종 때부터는 제도화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강우량을 측정하는 수표의 경우와 같이 처음에는 풍기대를 절의 당간 지주처럼 만들었으리라 추측된다.

풍기대는 지금 없어지고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동궐도(東闕圖)'에 그림으로만 남아 있는 조선시대 관측기의 실증적 유물로, 기상관측기의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기록>>

대궐 가운데에는 풍기가 있는데 이는 곧 옛부터 바람을 점치려는 뜻으로서, 창덕궁의 통제문 안과 경희궁의 서화문 안에 돌을 설치하고, 거기에 풍기죽(風旗竹)을 꽂아 놓았다.

 

♧ 창경궁내팔각칠층석탑(昌慶宮內八角七層石塔)

*보물 제1119호(1992년1월15일 지정)

 

  

 

창경궁내에 연못(춘당지) 옆에 건립되어 있는 탑으로 기존의 석탑과는 양식을 달리하는 석탑으로 8각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지대석과 기단부가 매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탑은 일제 강점 초기 1911년에 창경궁에 이왕가박물관을 건립할 때 만주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 석탑은 크게 지대석,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지대석과 기단부가 탑신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며, 탑신부에서도 초층의 탑신이 둥근 복발형으로 국내에서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특징이 있다.

기단부는 3단의 바닥돌 위로 높직한 1단의 기단이 올려진 모습인데 각 면마다 조각으로 가득차 있다. 바닥돌은 4각으로 밑단을 두고 그 위로 2단의 8각 바닥돌을 두었는데, 8각의 각 면마다 안상을 얕게 새겼다. 기단과 닿는 곳에는 1단의 연꽃받침을 놓았으며, 기단은 각 면마다 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기단의 맨윗돌 역시 연꽃무늬와 안상을 장식하였고, 그 위로 높직한 연꽃괴임돌과 2단의 낮은 괴임대를 두어 1층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7층에 이르는 탑신의 1층 몸돌은 높고 볼록한 모습이다. 2층부터 납아지며 지붕돌은 목조건축의 지붕처럼 기왓골이 표시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후대에 보충한 듯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탑신 받침 측면에는 가로.세로 약 50cm 정도 크기로 보이는 정방형 판돌이 끼워져 있는데 맨눈으로는 판독이 불가능하나 희미하게 글씨가 새겨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1행 3자씩 4행의 명문과 1행의 조성연대가 새겨져 있다.

'大明成化六年庚寅歲秋七月上澣吉日造'란 조성연대 기록에서 성화6년은 명나라 헌종 때의 연호로 조선 성종1년(1470)에 해당되어 이 탑을 1470년에 세웠음을 알 수가 있다.

 

♧ 창경궁 관천대(昌慶宮 觀天臺)

*보물 제851호(1985년8월9일 지정)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는 천문기구인 간의를 놓았던 돌로 만든 대이다.

관천대의 유물은 창경궁에 설치된 것과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관상감 자리인 옛 휘문중고등학교 자리인 지금 현대건설주식회사 건물 대지 안에 있는 관상감 관천대 두 개가 있을 뿐이다.

이 유물은 조선 후기 숙종 때 만들어진 것이며, 사적 제296호인 관상감 관천대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서운관지>>에 의하면 창경궁 안의 천문 관측소인 관천대는 조선 숙종14년(1688)에 만들어졌으며, 높이 3m, 가로 2.9m, 세로 2.3m 정도의 화강암 석대 위에 조선시대 기본적인 천체관측 기기의 하나인 간의를 설치하고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간의는 없고 석대만 남아 있는데, 당시에는 관측소를 소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도 불렀다.

관상감의 관헌들은 이 관측대에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측하였으며, 17세기의 천문 관측대로서는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귀중하며, 관상감에서 세워졌던 조선 초기의 또 하나의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 천문대 양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서운관지>>에 관상감과 관천대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본감이 하나는 경복궁 영추문 안에 있고, 하나는 북부 광화방에 있었는데 거기에 관천대가 있었다. 중간에 전쟁을 만나 창경궁의 금호문 밖과 경희궁의 개양문 밖에 고쳐 세웠는데 다 관천대가 있었다. 흔히 첨성대라 부른다. 숙종 무진년(1688)에 영감사 남구만이 몸소 터를 살펴 관가를 처음 세우니 이것이 금호동 밖의 본감이다.

하늘을 살펴 숙직하는 제도가 한 때 성하게 갖추어졌고~~~

대의 설치규모는 대략 같고, 청사 동서쪽의 집은 작다. 이 때에 김창집이 본감을 감독하였다. 세월이 오래됨에 무너져 황폐하니 이에 임금께서 신미년에 비로소 건물을 세워 측후하는 곳을 갖추었다. 무인년에 또 문과 결채를 세우고 관천대를 호조에서 수리하였다.

동쪽과 서쪽 방과 청사가 7칸 반이고, 이 청이 3칸이며 대문 좌우의 행랑이 각각 1칸이고, 해시계와 측우기가 있다.

관천대는 청사 남쪽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돌난간을 둘러 평방석을 올려놓았는데, 천체를 관측할 때에는 그 위에 소간의(小簡儀 천체들의 자리를 관측하는 천문관측기구인 간의를 보다 작고 편리하게 만든 것으로, 적도환, 백각환, 사유환의 3개의 환으로 이루어져 있다)를 설치하였으므로, 소간의대라고도 한다."

 

♧ 창경궁 성종태실 및 비

 

 

 

양화당의 동북쪽 구릉지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태실은 4각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의 몸체를 놓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었으며 상륜부는 보주로 장식하였다.

태실비는 태실 동쪽에 있는데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고 비산 앞면에는 "성종대왕 태실"이라 새겨져 있다. 이들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태를 묻은 곳인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에 있었던 것인데 1928년 전국에 있는 조선 역대 임금의 태실을 대부분 서삼릉으로 이봉하면서 원래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태전리에 있던 성종태실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성종은 세조3년(1457) 덕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예종의 뒤를 이어 1469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뒤 2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경국대전'의 반포 등 조선의 문물 제도를 완비하는데 힘을 기울엿으며 특히 창경궁을 창건한 임금이기도 하다.

 

◎ 창경궁의 정자와 기타 문들

 

 

♧ 관덕정(觀德亭)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있는 사정으로 인조20년(1642)에 취미정(翠微亭)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현종5년(1664)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한다.

'예기(禮記)'에 "활쏘는 것으로 덕을 본다. 쏘아서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남을 원망치 않고 제 몸을 반성한다."라는 것에서 이름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면 1칸, 측면 1칸에 초익공계 양식이며 팔작지붕으로 된 정자 건물로 화강석 기단 위에 각초석을 놓고 각주를 세웠으며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구조상 특이한 것은 측면에 비해 정면이 2배 정도 넓으나 같은 한 칸씩으로 구성되어 정면 중앙부에 수장폭 크기의 간주를 세우고 좌우 1/4 지점에 각각 대들보를 올려 놓았다.

대량머리는 외부로 빠져나오지 않고 내부에서 창방 위에 얹혀 있는 상태이고 네귀의 기둥 위에서만 창방의 뺄목을 익공으로 조각하였다.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창덕궁, 창경궁 후원에 상림십경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관덕풍림(觀德風林)이다" 하였다.

 

♧ 선인문(宣仁門)

 

홍화문에서 이어진 궁 담장의 남쪽 곧 창경궁 동남쪽 담장에 있는 궁문이다.

이 문은 성종15년 초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관해군8년에 재건하였는데 철종8년(1857) 다시 소실되어 고종14년(1877)에 복원하였다. '동궐도'에 보면 현재의 월근문과 같이 솟을지붕의 외관을 갖추고 있었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건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이 문의 예전 이름은 서린문(瑞燐門)이라 하여 동궁의 정문이었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이 문으로 출입하였다 한다.

 

 

 

 

 

 

♧ 월근문(月覲門)

홍화문 북쪽에 있는 이 문은 정조가 그 부친 사도세자의 묘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정조3년(1779)에 건립하였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동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하였기 때문에 월근문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 집춘문

창경궁 동북쪽 담장에 있는 궁문으로 서울 문묘가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있다. 현재 이 문 외부지역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어 출입문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이 문은 후원의 동문으로, 태학 서쪽 반교와 제일 가까워 역대 임금들이 태학으로 나갈 때에는 이 문을 경유하였다고 한다. 초창은 창경궁 창건 때인 성종 때이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조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여진다.

 

 

 

▲ 창경궁 내의 우물과 석탑

 

▲ 창경궁 내의 산책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