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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탐방 시리즈(2) 경복궁(慶福宮)

왕마구리 2010. 11. 22. 11:51

◀ 조선을 상징하는 경복궁(慶福宮) ▶  

 

600여년 전에 개국한 조선 왕조는 서울을 수도로 정하였는데, 서울은 수려한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강과 하천이 흘러 사람이 생활하기에 편리하며,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적합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울을 수도로 정한 뒤에는 곧바로 궁궐을 짓고 종묘와 사직을 세웠으며, 도성과 성문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팔요한 시설들을 마련했다.

서울은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600년이 넘게 우리나라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현재 서울 도심에는 넓은 도로와 고층 빌딩이 가득하지만 백여년 전만 해도 서울은 왕실 가족이 거처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나하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통 도시였다. 최고의 인재와 물산이 궁궐과 왕실이 있는 서울로 모여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에는 품격있는 왕실 문화가 발달하였다.

궁궐은 나라 경영의 중추가 되는 소중한 장소였으며,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이 있다.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다. 이들 궁궐과 종묘는 한 나라를 상진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에 당대 최고의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창덕궁과 종묘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 왕조는 예의와 도덕을 숭상하며 이로써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검소함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기본 정신은 궁궐 건축에도 잘 드러나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고, 절제된 아름다움은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에서 만날 수 있는 미덕이다. 궁궐은 우리 역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자 왕과 왕실 사람들이 생활하며 희로애락을 담아낸 삶의 공간이다. 궁궐이 전하는 역사, 인물, 건축, 자연 등 숱한 이야기 속에는 우리 선조들이 오랜 역사와 삶 속에서 터득해낸 지혜와 슬기로움이 담겨 있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를 대표하는 제일의 궁궐이다.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가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다지기 위해 가장 먼저 건립한 궁궐로서,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규모가 크고 격식도 매우 엄중하다.

경복궁은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목멱산)에 둘러싸여 있고, 펀계천이 흐르는 평지에 자리를 잡았다. 입지를 고를 때에는 젛은 땅은 좋은 기운을 불러들인다는 생각에 매우 신중했으며, 전각들은 최고의 권위자인 왕이 머무는 공간인 만큼 나라에서 으뜸가는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왕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돌보고 왕실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궁궐에는 필요한 전각들이 많았다.

경복궁은 수많은 전각과 이들이 이루어내는 공간은 창건 당시부터 매우 짜임새 있게 계획되었다. 궁궐의 주요 문과 전각인 정문인 광화문과 편전인 근정전, 침전인 강녕전은 남북을 축으로 하는 일직선상에 놓았고, 이들 주요 전각에 딸린 부속 전각들은 각 영역 안에서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배치하였다.

둘레에는 네모반듯하게 궁성을 쌓았고 동서남북 네 방향에 문을 냈다.

경복궁 건축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엄중한 질서와 절제의 위엄은 예의와 도덕으로써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자 한 조선 왕조의 기본 정신에서 비롯된다. 궁궐의 전각들이 각기 서열과 쓰임새에 걸맞는 규모와 모양새로 지어졌을 뿐 호사스럽거나 위압적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이다.

경복궁은 '만년토록 빛나는 큰 복을 지닌 궁궐'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여기에는 하늘의 뜻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며, 대대손손 태평함을 이어가겠다는 조선 왕조의 강한 소망과 이상이 담겨 있다.

경복궁이 가장 활기찼던 시절은 세종 때로 집현전을 중심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각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며 우수한 인재를 길러냈고, 백성의 생활에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술을 개발하고 제도를 고쳐나갔다.

특히 세종은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을 발명해 냈다. 한글에 대한 해설서로 펴낸 '훈민정음'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고종은 임진왜란 후 273년 동안 빈 터로 남아 있던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330여동(7,700칸)의 전각을 지었다. 현재 궁궐 곳곳에 깔린 잔디밭은 대부분 건물이 빼곡히 들어섰던 곳들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복원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 속에 강녕전, 교태전, 자선당, 비현각, 건청궁, 태원전, 흥례문, 영제교, 광화문 등 주요 전각과 문, 다리가 복원되었다.

【 방문일자 】2010년 11월 11일(목)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3월~10월 09:00~18:00/11월~2월 09:00~17:00(매주 화요일 휴궁)

*관람요금 : 어른(19~64세) \3,000/청소년(7세~18세) \1,500

                  통합관람권 \10,000 : 4대궁(경복궁, 창덕궁<후원포함>,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 관람 가능

*교통안내 :

  - 지하철 : 경복궁역(3호선) 5번출구 도보 5분, 광화문역(5호선) 2번출구 도보 10분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22

【 창경궁 탐방코스 】

선인문-매표소-홍화문(보물 제384호)-옥천교(보물 제386호)-명정문 및 행각(보물 제385호)-명정전(국보 제226호)-숭문당-문정전과 문정문-함인정-경춘전-통명전(보물 제818호)과 지당-양화당-풍기대(보물 제846호)-성종태실 및 비-춘당지 및 창경궁내 팔각칠층석탑(보물 제1119호)-대온실-영춘헌 및 집복헌-관천대(보물 제851호)-홍화문

 

 

 

【 경복궁 소개 】

*사적 제117호

- 경복궁의 역사

경복궁은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정궁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궐조로 불린다.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가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태조3년(1394)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하였다.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 태조실록 6권 3년 9월 9일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은 이때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 : 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勤政門 : 남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년(1398년)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때로 추정된다.

경복궁은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전각이 더 지어지고 보완되었는데, 태종 11년(1411년)에는 명당수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궁궐의 상징성과 풍수적인 형국을 보완하였는가 하면, 경회루를 지어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이용케 하였다.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 때였는데, 1426년(세종 8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그밖에 간의대 등의 관측시설이 세종 때 완비되었다.

 

1553년 화재

명종 8년(1553년) 9월에는 실화로 강녕전에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등이 불타버렸다.

불이 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554년 봄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9월에 낙성하였다. 이 때에 동원된 인력이 부역이 2,200명이었고 품팔이꾼이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 때에 건립된 경복궁을 그린 ‘한양궁궐도병’이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림은 임진왜란 당시에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 임진왜란

1592년 선조가 피란할 때에 난민이 발생하였고, 노비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궁궐들을 난민들이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유성룡의 《서애집》에는

"왕실과 관료들이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을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이 궁중으로 침입하여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보물도 약탈했다."

라는 기록을 볼 수가 있으나 이는 목격담이 아니라 전해 들은 것으로, 유성룡이 불탄 궁궐을 직접 목격한 것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인 계사년(1593년) 4월 20일이었는데, 이때 종묘는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후였다. 그러나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인 1592년 5월에 기록된 종군승(從軍僧) 제다쿠의 《조선일기》에는 왜군이 한성에 입성한 직후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경복궁의 전각들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북산 아래 남향하여 자궁(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각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자 네 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기록들로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은 왜군과 조·명 연합군의 전투가 거듭되면서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환도 후에는 월산대군의 옛 집(광해군 3년 이후로 경운궁, 지금 덕수궁 일부)을 임시로 사용하였다.

▷ 대원군의 중건

임진왜란 후로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1865년(고종 2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이 시작되어 같은 해 4월 13일 공역이 시작되어 1868년 6월 말에 공사를 마쳤으며, 7월 2일 국왕과 왕실의 경복궁 이어(移御)가 이루어져 정무를 개시하였다.[13] 경복궁의 재건을 주도한 흥선 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공사를 마치기까지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7년이 넘게 걸렸는데, 경복궁에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승정원, 홍문관 등 기타 여러 관아가 정비되어 있었다.

중건된 경복궁의 많은 건물은 그 뒤 몇 차례 소실되고 복구되기를 반복하였다.

고종 32년(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시해당하고, 이듬해 양력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된다.

▷ 일제강점기

1910년에 한일합방 이후 경복궁은 훼손되어 본 모습을 잃게 된다.

1910년 이후 경복궁 내의 여러 건물을 헐고 민간에 팔던 일제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건물 4,000여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여 평에 달하는 18개소의 상품 진열관을 설치하였다. 전시회가 끝나자 일제는 경복궁 안에 궁궐 시설과 무관한 각종 석탑, 부도, 석등, 불상 등을 전국 각지에서 옮겨 배치하고 음악당을 설치하였으며,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에 큰 화재가 나서 침전이 모두 불타버리자, 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이 침전인 강녕전, 교태전, 연길당, 함원전, 경성전 등을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헐어내어 창덕궁의 침전 복구공사 재목으로 썼으며, 1918년부터는 왕권의 상징인 근정전,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을 유물 전시실로 이용하였다.

1916년부터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과 영제교 등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에 완공하였다.

총독부 청사 신축을 두고 조선내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인들까지 맹렬히 비난하여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27년 9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헐어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이 밖에도 일본인들은 1929년 5월에는 융무당(隆武堂), 융문당(隆文堂) 등을 헐어 한강로에 용광사를 지었으며, 1932년에는 선원전을 헐어 장충동에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비는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지었다.

1940년에는 건청궁터에다 미술관(옛 전통공예전시관)을 지으며 수많은 내전 건물들을 헐어버렸다.

일제 시대를 거치며 경복궁에 남게 된 건물은 1865년(고종 2년)에 건설한 건물로 건춘문, 천추전, 신무문, 동십자각이 있고, 1867년 건설한 건물로는 근정전, 사정전과 주변 회랑 및 행각, 제수합, 함화당, 경회루, 수정전, 경안당 등이 있으며, 1873년에 지은 건물로는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이 있다.

▷ 해방 이후

해방 이후 경복궁 내에 국립중앙박물관(현 국립민속박물관), 후생관(용산으로 이전하기 전의 국립중앙박물관), 제2별관(옛 문화재연구소) 등이 건립되고 서북쪽에는 군부대가 주둔하였다.

광화문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문루가 타버리고 석축만 남아있던 것을 1963년에 원래 위치에다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였다. 이후 1990년에 들어서 대한민국 정부는 20년 계획으로 경복궁 복원사업 1차 복원정비사업을 시작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 총독부 청사를 1995년에서 1996년에 걸쳐 문민정부가 철거하였다.

2010년 현재, 경복궁 1차 복원정비사업이 완료되어 89동 8987㎡(2720평)의 건물이 복원됐다. 일제의 철거를 피해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해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 당시 경복궁 건물 500여 동의 약 25% 수준에 도달하였다. 2010년 9월이후 광화문권역이 완전 개방되며 이후 복원작업은 2차 정비사업과 장기복원으로 나누어져 2차복원에는 수정전 앞 궐내각사지역이 현재 복원 진행중이며 흥복전권역이 복원예정에 있고 전체적인 궁장과 동서십자각도 복원예정에 있다. 2차 사업까지 완료하면 고종당시의 75%수준으로 복원이 되며 그 이후 장기 복원계획은 국립 고궁박물관과 국립 민속박물관및 관리사무소 주차장등 시설의 이전에 맞춰져 진행된다.

- 경복궁의 건축

창경궁의 위치한 곳 서쪽으로 창덕궁이 붙어있고 남쪽으로는 종묘와 통하며 조선시대 왕궁 가운데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 경복궁의 문화재들 】

◎ 궁궐의 얼굴 - 광화문(光化門)

제 모습을 찾다!!!

경복궁의 4대문은 높은 석축 위에 우뚝 선 문루와 석축 가운데로 난 아치형의 홍예문을 갖추어 성곽의 문과 같은 웅장함을 자랑한다.

그 중 정문인 광화문은 문루가 2층이며 홍예문이 셋으로, 조선 궁궐의 모든 문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어 그 위풍당당함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조선 태조 때 건립된 이후 임진왜란으로 인한 전소, 일제의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에 따른 이전, 6.25전쟁시 문루 소실 등 험난한 질곡의 세월을 겪었으며, 1968년 중심축이 틀어진 채 콘크리트로 복원되어 제대로 된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2010년 8월, '제 모습을 찾은 광화문'이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고종 연간의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일제에 의해 변형된 축선이 제자리를 찾았고, 금강소나무로 재건된 문루는 한국적 건축미를 뽐낸다. 현판 또한 당시 글씨를 되살려 완성되었다.

이러한 광화문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고 우리의 새로운 역사를 활짝 열어갈 문이 될 것이다.

 

♧ 경복궁 광화문(慶福宮 光化門)

 

 

 

▲ 광화문의 야경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원래의 이름은 정문이었으나, 세종때에 와서 광화문으로 명칭이 바뀐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으나, 광화문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잠시 이동하였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홍예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광화문은 조선 초기에 경복궁을 지으면서 같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이 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 정문(正門)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천자와 제후(諸侯)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행하지 못하고 조작과 거짓으로 부탁하지 못할 것이며, 아뢰고 복명함이 다 이 문으로 들어와서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功緖]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 《삼봉집》기09 경복궁, 정도전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방화로 소실되었으나, 구한말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재건되었다.

복원 전의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그 위치가 옮겨졌으나, 한국 전쟁 때 목조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이후 1968년에 석축은 그대로 두고 현판은 새로 만들고 상부는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자리는 경복궁의 본래축이 아닌 총독부건물의 축에 맞춰 재건축하였으나, 건축 전부터 겉모양만 복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1995년에 문민정부에서는 2003년부터 광화문을 철거하고 2009년까지 본래의 위치에서 석축 위의 목조 건물로 복원할 것을 발표하였다.

2006년에 문화재청 주도의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기존의 광화문을 고종 중건기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철거 · 해체하였다. 광화문 복원 사업은 2010년 10월에 완료될 예정이었으나 G20 서울 정상회의의 개최로 인해 앞당겨져 8월 15일 광복절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 복원하여 공개된지 3개뤌 여만에 금이 간 광화문 현판

 

◎ 궁궐의 중심 - 외전(外展)

왕과 신하, 나랏일을 의논하다!!!

근정전은 왕이 문무백관에게 조회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며 즉위, 책봉, 혼례 같은 나라의 주요한 행사를 치르는 곳으로, 왕과 나라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공간이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중층의 전각은 높고 넓은 2층의 월대 위에 당당히 올라서 있으며, 근정전 주변을 둘러싼 행각의 기둥들은 마치 왕을 호위하는 듯 줄지어 있다.

마당 한 가운데에는 왕이 다니는 어도가 있고, 좌우에 신하들이 걷는 신도가 따로 있으며, 신하들이 지위에 맞추어 자리하도록 풍계석을 세웠다. 왕을 중심으로 신분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사정전은 왕이 평소 머무르며 나랏일을 돌보았던 곳으로, '깊이 생각하여 나랏일에 임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조선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세종이 밤늦도록 학문을 연구하고, 집현전 학자들과 의견을 나누었던 곳은 사정전이다. 집현전은 세종이 궁궐 안에 설치한 인재 양성과 학문 연구의 기관이다.

집현전 이외에도 왕의 집무 공간 가까운 곳에는 업무의 신속한 처리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설치한 관청들이 있었다.

궐 안에 들어왔다 하여 '궐내각사'라 불린 여러 관청 전각들 가운데 현제 수정전이 남아 있다. 수정전이 들어서기 전 그 자리에 있던 전각이 세종 때 한글 창제의 산실이 되었던 집현전이다. 한편 궐밖에 있다 하여 '궐외각사'라 불렸던 관청들은 광화문 앞쪽의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에 있었다.

 

 

♧ 경복궁 근정전(慶福宮 勤政殿)

*국보 제226호(1985년1월8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경복궁 내)

 

 

 

 

▲ 근정전의 야경

 

 

근정전은 경복궁에서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이자 법전(法殿)이었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 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조선 전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임진왜란 전에는 주변 회랑이 단랑(單廊)이었으나, 현재의 근정전은 복랑(復廊) 형식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서 약간 북쪽에 이단의 상ㆍ하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어진 다포계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로 아래층의 고주가 위층의 변주가 되는 구조이며, 창방.평방 위에 놓인 다포계의 공포는 외삼출목, 내사출목으로 기둥머리마다 직각방향으로 튀어나온 안초공을 두었다. 공포의 전체 조형은 판재화하는 조선 후기 다포계 건물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천장은 대들보 윗부분부터 우물천장으로 천장 중앙에는 다포계의 천개를 설치하고, 개판에 운룡을 부조했다.

팔작지붕의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을 했고,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와 잡상을 올려 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아 위엄을 더했다.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가장 높고 규모가 크며, 조선 후기 다포계 건축의 특징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정전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박석(薄石)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로 난 어도(御道) 좌우로 문ㆍ무관이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쌍의 품계석이 놓여있다.

근정전 건물 외관은 충층이지만, 내부는 층의 구분없이 전체가 트인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뒷면 내진주 중앙에는 어좌를 마련하였고, 그 뒤에는 일월오악도의 병풍이 있다. 천장 중앙에는 보개(寶蓋)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그리고, 발톱이 7개인 칠조룡(七爪龍) 한 쌍을 만들어 달았으며, 건물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본래 건물 안에는 의장기물이 가득 장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월대의 주위를 둘러싼 회랑은 흥례문의 좌우에서 시작해 향오문의 좌우로 연결되면서 근정문과 사정문의 좌우에도 이어져 직사각형의 회랑은 모두 3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근정전의 좌우 회랑에는 동쪽에는 융문루, 서쪽에 융무루, 그 북쪽에 동서행각문인 계인문과 협의문을 두었다.

개요

근정전은 조선 시대 궁궐의 법전 가운데 유일하게 상월대와 하월대에 난간을 두르고 복을 가져다 주는 돌짐승들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는 경복궁이 법궁으로서 갖는 위상을 근정전의 격식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상월대의 난간에는 방위신에 해당하는 사방신(四方神)을 동서남북의 방향에 맞게 조각해 놓았고, 상월대와 하월대의 난간 곳곳에는 십이지신(十二支神)과 상서로운 동물(瑞獸)들을 조각해 근정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는 지붕이 용 문양으로 장식된 청자기와로 지어져서 푸른 유리 지붕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 근정전의 답도

 

▲ 답도의 봉황 문양과 근정전 앞 마당의 쇠고리

 

내부에는 일월오봉병(日月五烽屛)으로 둘러쳐진 왕이 앉는 의자인 어좌(御座)가 높은 대 위에 있고 통간으로 높은 천장을 형성하였다. 천장 중앙에는 7개의 발톱을 갖고 있는 용 2마리를 나무로 조각해 매달았다.

 

 

▲ 근정전 내부의 어좌와 천장

 

이름의 유래

다음은 근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

“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일이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한 것만 가르쳐서 나라를 유지하려고 하지 말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 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순임금과 우임금의 부지런한 바이며,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을 갖지 못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한다.’ 하였으니,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하게 봉양하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 떠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따라서 말하기를, ‘천하에서 나랏일로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혼자 비굴하게 노고를 하겠는가?’ 하며, 이에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구경거리로, 혹은 토목(土木)일 같은 것으로써 무릇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임금은 ‘이것이 나를 사랑함이 두텁다.’ 하여, 자연으로 태만해지고 거칠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예전 삼대(三代) 때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으니, 신은 이로써 이름 하기를 청하옵니다. ”

  —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慶福宮 勤政門 및 行閣)

*보물 제812호(1985년1월8일 지정)

*소재지:서울 종로구  세종로 1-1

근정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복도 건물인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근정문과 행각은 고종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세우면서 근정전과 함께 같이 지은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금천교, 어구, 흥례문을 비롯하여 이곳도 해체ㆍ철거되었는데,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고 이 일대를 재건하면서 원래 모습을 찾았다.

근정문(勤政門)은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형태가 날카롭고 곡선을 크게 그리고 있어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일이 없는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고 대신 관리들이 궁에 출입할 때는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이용하였는데, 음양으로 볼 때 태양을 뜻하는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

행각은 근정전의 둘레를 직사각형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데 원래는 한 칸 복도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2칸 복도로 만들었다. 양식과 구조는 간결하게 짜여 있으며 남행각이 연결되는 곳에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북행각 가운데에 사정문(思政門)이 있다. 동·서쪽으로는 각각 밖으로 돌출한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가 있다. 벽에 만든 창의 형태는 사각형의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 경복궁 흥례문(慶宮 興禮門)

*보물 제385호(1963년1월21일 지정)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원래는 세종 8년(1426)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 올렸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근정전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근정문 뒷 편의 사정전과 강령전, 교태전도 모두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다만 경복궁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은 한쪽으로 틀어져 있는데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헐어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하면서 원래의 위치가 아닌 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추어 지었기 때문이다. 이후 광화문은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으로 인해 한일강제병합 100년인 2010년 8월15일에 기울여졌던 3.75도를 바로 잡고 고종 때 제건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흥례문과 영제교 

 

♧ 경복궁 영제교(慶福宮 永濟橋)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지엄하고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전의 외당 앞에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금천에 설치한 다리이며, 덕수궁의 금천교, 창덕궁의 옥천교와 금천교도 같은 이치로 지어진 다리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가량으로 비교적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중앙이 3.4m, 그리고 양쪽이 각각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어도(御道, 왕의 길)로서 왕의 어가가 지나는 길이다. 다리 발은 홍예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돌난대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난간 전후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가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광화문 밖의 서수가 뿔이 보이지 않는 데 반해 영천교의 이 서수들은 뿔이 보이고 있는데 정전의 앞이기에 더욱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듯하다.

 

♧ 경복궁 사정전(昌慶宮 思政殿) 일원

 

◇ 사정전(思政殿) 

 

 

 

 

 

근정전(勤政殿) 뒤 사정문(思政門) 안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로,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면서 정사를 보살피는 전당이다.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종11년(1429)에 중수했다고 하며, 세종 때에는 이미 편전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초기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고종 4년(1867)에 중건된 것이다.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는 뜻으로 사정전이라 하였다고 한다. 세종 17년(1435)에 세종은 이곳에 있으면서 자치통감훈의를 짓게하고 이를 이름하여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 하였다. 세조 때는 사정전 앞 낭무(廊?)에 큰 종을 달고 군정(軍政)을 보살필 때면 엄히 다스린다는 호령으로 이 종을 쳤다.

동쪽에 만춘전(萬春殿), 서쪽에 천추전(千秋殿)이 있어 세 건물이 편전 일곽을 형성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단층 팔작기와지붕의 다포집이다. 마당보다 약간 높게 한벌의 디딤돌 위에 세 개의 계단이 마련된 장대석 축대를 쌓고 둥근 초석을 놓았다. 사면 둥근 기둥 사이에는 흙벽을 치지 않고 사분(四分)의 광창(光窓)과 문틀만으로 짜여졌고, 그 위에는 빗살무늬의 교창(交窓)이 있어 집 속을 밝게 하였다.

 

 

기둥 윗몸에는 창방과 평방을 짜돌리고 내외이출목(內外二出目)의 공포를 놓았다. 내부는 대들보 위를 우물천장으로 가렸고, 작은 내부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특별한 가구법을 썼고, 어좌를 치한 뒷벽에는 운룡이 활달한 필치로 그려져 있는데, 경복궁 내의 유일한 벽화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각 등성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각각 배열하였다. 양식상으로는 별다른 특징이 없으나,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편전이 모두 정전의 측면에 있는 것과 달리 이 건물은 정전의 정북방에 위치하고 있어,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正宮)으로서 질서정연한 배치원칙을 따르고 있음을 이 건물의 위치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의 중심 건물로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편전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사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

“ 그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이는 누구나 높고 영광되고자 아니하고 위태롭고 악하고자 하였겠습니까마는, 옳지 못한 사람을 가까이 해서 계책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에 화패(禍敗)에 이르게 된 것이니, 진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

  —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 사정문(思政門)

 

이 문은 근정전과 사정전 사이의 근정전 북행각(北行閣) 중앙에 위치하는 사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건물이다. 이 문은 근정전 일곽의 행각(行閣)이 완성된 고종 4년(1867)에 건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평면 형식은 일반적인 삼문(三門) 형식으로 도리간(道里間) 세 칸 전체에 판문(板門)을 달았고 구조 방법은 간결한 초익공식(初翼工式)으로 홑처마집이다.

기단은 한벌 장대석(長臺石)을 놓고 약간 높은 원형주좌초석(圓形柱座礎石)을 배열하여 훤칠한 원주(圓柱)를 세워 익공(翼工)을 짜아 지붕 하중(荷重)을 받게 하였다. 근정문에 비하면 왜소하고 간결하나 근정전의 후문격이 되고 사정전의 높이를 의식하여 조영된 배경 때문에 근정문과의 큰 격차를 둔 것 같다. 지붕마루에는 용마루, 내림마루에 양성을 바르고 간단한 용두(龍頭)들을 배치하였다.

 

천추전(千秋殿)

 

 

 

천추전은 왕의 편전(便殿)으로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다. 사정전의 보조 역할을 하였다.

사정전 서편에 위치한다. 원래 동편에도 대칭으로 만춘전(萬春殿)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에 소실되어 현재 이 건물만이 남아 있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평면으로 모두 24칸의 규모인데 전면 중앙 2칸은 전퇴(前退)를 달고 그 후면은 마루로 되었으며 마루간을 중심으로 동 · 서에는 온돌방을 두어 양측면 기단(基壇) 밑에서 보온할 수 있도록 2개의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이 건물은 기둥을 모두 방주(方柱)로 하였고 출입은 전면 중앙의 2칸을 통해 할 수 있고 사정전에 비하면 모든 건축 법식이나 양식을 검소하게 꾸며 서민적 풍취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전면을 6칸 우수로 잡은 것은 궁의 편전 부속 건물로서 격을 많이 떨어뜨린 감을 준다. 공포(慊包)도 익공식(翼工式)이며 지붕은 팔작(八作)이지만 마루에는 양성을 바르지 않고 적새기와만을 얹었다. 건립연대는 고종 2년(1865)이다.

 

만춘전(萬春殿)

 

만춘전은 사정전을 보좌하는 부속 건물로서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편전(便殿)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전쟁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터만 남아 있다가 1988년에 복원하였다. 예전에는 사정전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중심 편전인 사정전의 좌우에 보조 편전인 만춘전과 천추전(千秋殿)이 대칭으로 나란히 섰다. 창건 당시에는 없다가 세종 연간에 만들어져 사정전 도서 행각 외부에서 사정전을 보좌하였는데 고종 때 중건하면서 지금과 같이 사정전 좌우로 병치하였다.

사정전 내부는 모두 마루를 깔았으나 좌우의 소침에는 온돌방을 두어 추운 계절에 쓸 수 있게 편의를 제공하였따. 현재의 만춘전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80년대에 정부에서 복원한 건물이다.

 

♧ 경복궁 수정전(慶福宮 修政殿)

수정전(修政殿)은 돌로 높고 넓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으로, 원래 이 자리엔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이 있었다. 1456년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을 폐지하였고,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버려져 있었다. 1867년(고종 4년)에 건물을 다시 짓고 이름을 수정전이라 하였다.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으로 추정되는 이 전물은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고 이후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은 지금은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는 담 역할을 하는 긴 집채인 행각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주변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여러 관청이 있었다. 서쪽에는 궁중의 경서, 문서 등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였던 옥당과 역대 왕들이 쓴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변사의 당상관 등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빈청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 등의 건물이 영추문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수정전 좌측 앞에는 장영실이 자격루를 세웠던 곳이라는 표식이 세워져 있다.

 

◎ 생활의 중심 - 내전(內展)

왕실의 일상생활을 만나다!!!

근정전, 사정전, 궐내각사 등 왕과 신하가 만나 나랏일을 의논하고 결정하던 '외전'영역이 위엄을 갖추었다면, 왕과 왕비를 비롯한 세자와 대비 등 왕실 가족이 생활하는 '내전'영역에는 친밀하고 섬세한 정서가 배어 있다.

강녕전교태전은 각각 왕과 왕비가 생활한 건물이다. 왕은 강녕전에서 독서와 휴식을 하였고, 때로는 신하들과 만나 편안하게 이야기도 나누었다. 국모인 왕비에게는 왕위를 이을 세자를 낳고, 왕실 가족의 화목과 질서를 유지할 의무와 권한이 주어졌다.

교태전의 아미산은 궁궐 안에 한번 들어오면 궐 밖으로 나가기 어려웠던 왕비를 위해 꾸민 정원이다. 야트막한 동산을 계단식으로 꾸미고 곳곳에 나무와 꽃을 가꾸었다. 화단에 세운 육각기둥 모양의 굴뚝에는 학, 박쥐, 봉황, 사슴,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덩굴, 바위 등 무늬를 장식하였다. 아미산과 굴뚝의 여러 장식이 어우러진 모습이 아기자기하다.

왕실의 웃어른이신 대비가 생활한 자경전의 뒤뜰에 있는 굴뚝에는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 자손의 번영을 상징하는 포도, 부귀를 상징하는 박쥐 무늬 등이 장식되어 있다. 자경전 각 방에 연결된 굴뚝을 한데 모았으며, 굴뚝이 담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교태전과 자경전을 둘러싼 담장 안팎의 꾸밈새도 아름답다.

세자가 왕위를 이을 사람이기에 '떠오르는 해'로 비유하였다. 생활공간도 내전의 동쪽에 두어 '동궁'이라 불렀다. 세자와 세자빈의 처소였던 자선당과 세자가 공부하며 정무를 익히던 비현각이 복원되어 있다. 세자 시절 문종은 아버지 세종이 좋아하는 앵두를 따드리기 위해 손수 궐내에 앵두나무를 가꾸었다. 그때 심은 나무들은 아니지만, 경복궁 안에 앵두나무가 유난히 많이 자라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자경궁 북동쪽 향원정과 국립민속박물관 앞 일대에는 왕실 가족과 그들의 시중을 들던 궁인들이 생활한 전각이 빽뺵했다. 궁궐에는 왕과 왕실의 직계 가족을 비롯하여 이들의 시중을 드는 궁인 등 적어도 3000여 명이 살았다.

 

 

♧ 경복궁 강녕전(慶福宮 康寧殿)

 

 

강녕전(康寧殿)은 왕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으로 태조4년(1395) 사정전 북쪽에 세워진 건물로 세종5년(1433) 중수했으며, 명종8년(1553)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다.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타 없어진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내전의 으뜸 전각으로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의 단층 팔작 지붕으로, 장대석 바른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민흘림 누리기둥을 세우고 쇠서 2개를 둔 이익공법이다. 왕의 침전이므로 교태전과 함께 용마루가 없으며,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 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 복원하였다.

 

▲ 사정전에서 강녕전으로 통하는 향오문

▲ 연길당 앞에서 바라본 강녕전 측면

▲ 경성전으로 통하는 협문

▲ 강녕전 내의 우물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곳인만큼 화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건물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강령전 뒷편의 교태전으로 가는 양의문 좌우에 굴뚝을 붙여 지었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魏)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너의 벗한 군자를 보니 너의 얼굴을 부드럽게 한다. 잘못이 있어도 멀리 하지 아니하고 너의 방에 함께 있으니, 방 한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

라고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 정도전,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강녕전의 소침

응지당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

 

 

 

연길당(延吉堂)

 

 

 

♧ 경복궁 교태전(慶福宮 交泰殿)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인 중궁전으로, 강녕전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면 9칸 규모의 건물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인 태조4년(1395)에는 없었으나 세종25년(1443)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명종8년(1553)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타버렸다. 고종2년(1865)에 중건되었는데, 1876년 다시 불탄 것을 1888년에 재건하였다. 1920년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서 헐려 건축부재로 사용되어, 본래 교태전 건물은 창덕궁으로 옮겨 지어 대조전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조선고적도보'에 당시의 사진과 평면도가 실려 있어 1995년에 재건하였으나, 굴뚝은 고종 당시 경복궁 중건 때의 것이다. 교태전 뒤편에 계단식 화단을 쌓아 아미산을 조성하고, 장식적인 굴뚝과 관상용 수석들을 배열해 정원을 만들었다.

교태란 양과 음이 교류한다는 뜻으로 주역에 있는 괘 이름이다. 건물 뒷편에는 정원인 아미산이 있는데 아미산을 볼 수 있도록 후면 동쪽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왕비는 통상 좌측 방을 이용하다가 임금께서 오시면 우측 방에 함꼐 합방하였다. 그 이유는 오른쪽은 양, 즉 임금을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교대전 뒤뜰의 아미산에 남아 있는 굴뚝에 새겨진 십장생, 매란국죽과 길상의 무늬로 보아 150여채의 궁궐건물 중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의문(兩儀門)

강녕전과 교태전 사이의 출입문

 

♧ 함원전(含元殿)과 흠경각(欽敬閣)

농본사회를 운영하는 왕의 역할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건물이다. 농업 위주의 전통 사회에서 시간과 천체의 운행에 맞추어 정치를 하기 위해 천체기구들을 왕실에 가까이 두었다.세종은 옥루기륜, 양부일구 등의 시계와 간의를 만들어 흠경각 일원에 설치하였다.

경회루 남쪽에 있는 보루각, 궁성 서북쪽의 간의대 등도 흠경각과 관련된다. 이와 달리 함원전은 불교 행사가 자주 열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채롭다. 현재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하였다.

 

 

함원전(含元殿)

 

 

 

흠경각(欽敬閣)

 

 

 

◇ 아미산(峨嵋山)

아미산은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돋운 작은 가산(假山)이지만,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온 맥이 북한산, 북악을 지나 경복궁에서 멈춘 장소이다. 아미산에는 괴석의 석분(石盆)과 석지(石池) 등 석조물이 배치되었는데, 이 가운데 보물 811호인 아미산 굴뚝이 있다.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으로,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4개가 남아있는데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혹은 31단으로 쌓고,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를 벽돌로 구워 배열하였고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 등 길상의 무늬 및 화마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윗부분은 조형전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도록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을 설치하였다. 굴뚝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의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경복궁 아미산의 굴뚝

*보물 811호(1985년1월8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제작시기:조선 태조 3년, 고종 4년 (추정)

 

 

 

 

경복궁 아미산의 굴뚝(景福宮峨嵋山-)은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의 구들과 연결되었던 굴뚝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중궁전(中宮殿)으로 태조 3년(1394년)에 창건되었다. 그 후 명종 8년(1553년)에 소실되어 1555년에 재건되었으며,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다시 소실되어 고종 4년(1867년)에 재건되었다. 이후 고종 13년(1876년) 또 다시 소실되었고 고종 25년(1888년)에 복구되었다. 원래의 교태전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지만, 굴뚝은 고종 당시 경복궁을 재건할 때의 것이다.

아미산은 교태전 일곽 뒤뜰에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가산(假山)이다. 아미산에는 2벌대의 장대석 석축이 네 층으로 쌓였고, 그 위에 괴석(怪石)의 석분(石盆)과 석지(石池) 등 석조물이 배치되었는데, 수석 1기는 1단에, 석분·석지는 1단·2단·3단에 있고, 굴뚝은 3단에 있다. 굴뚝 3기는 3단에 나란히 있고, 나머지 한 기는 동쪽 조금 뒤편에 있으며, 주위에는 화초들이 심어져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4기의 육각형 평면을 한 굴뚝들이다. 굴뚝들은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또는 31단으로 쌓였고, 육각의 각 면에는 당초무늬·학·박쥐·봉황·나티·소나무·매화·대나무·국화·불로초·바위·새·사슴·나비·해태·불가사리 등의 무늬가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각 무늬는 조형전(造形塼)을 구워 배열하였고, 그 사이에는 회(灰)를 발라 화면을 구성하였다.

육각의 각 면은 네 가지 종류의 무늬로 구성되었는데, 굴뚝 제일 아랫부분은 벽사상으로 불가사리를 부조한 사각형의 벽돌을 끼웠고, 그 위의 직사각형 회벽에 십장생·사군자 또는 만자문(卍字文)을 조각했으며, 그 위에 다시 봉황과 귀면 등이 부조된 네모 반듯한 벽돌을 끼웠고, 윗부분은 회벽에 당초문(唐草文)으로 구성하였다. 이들 무늬 위로는 목조 건축물의 소로와 창방·첨차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으며, 정상부에는 점토로 만든 연가(煙家)를 각 4기씩 두어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기능은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이지만, 그 형태나 위치가 정원과 어우러져 뛰어난 조형미를 이루고 있다.

 

♧ 경복궁 자경전(昌慶宮 慈慶殿) 일원

자경전(昌慶宮 慈慶殿)

*보물 제809호

▲ 자경전 청연루 

▲ 담장 밖에서 바라본 자경전

 

자경전(慈慶殿)은 경복궁 남아 있는 유일한 왕비의 정침(正寢)으로 경복궁 교태전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교태전에 있던 왕비는 대비로 높여져 정침인 교태전을 새로 중전이 된 왕비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때 대비가 교태전에서 옮겨와 주로 머물던 곳이 자경전이다.

현존하는 침전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로, 현재의 자경전은 조대비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 2년(1865년)에 자미당 터에 지은 뒤 불에 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재건한 것이다.

전면 마당 동ㆍ남ㆍ서쪽에는 각각 동행각, 남행각, 서행각이 일곽을 이루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자경전 뜰 앞 왼쪽에는 돌짐승 조각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배롱나무가 한 그루 있다.

 

▲ 자경전 내부 담장의 문양과 협문

 

▲ 자경전 외부 담장

 

자경전의 담장은 벽돌로 모양을 내어 꾸몄는데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던 건물인 만큼 만(卍),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등의 글자들과 소나무, 국화, 거북 등, 연꽃, 대나무, 모란 등의 대왕대비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들어 만(卍)의 경우 글자의 모양을 계속 그려나가면 끝이 없으므로 영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거북 등 그림의 경우 장수하는 동물 중 하나가 거북이므로 역시 대왕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 자경전 담장의 문양들

 

자경전 후정 담의 중앙부에는 자경전 십장생(十長生) 굴뚝이 있다. 이 굴뚝은 담보다 한단 앞으로 나와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어있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 및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고 십장생 무늬로 장식하였다. 경복궁 자경전(景福宮慈慶殿)은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사업을 하던 고종 4년(1867년) 대왕대비 조씨를 위하여 경복궁에 지은 전각으로, 화재로 불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다시 지었다.

개요

경복궁 자경전은 왕비의 정침인 경복궁 교태전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왕이 승하하면 교태전에 있던 왕비는 대비(大妃)로 승격되어 정침인 교태전을 새로 중전이 된 왕비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때 대비가 주로 사용하던 곳이 자경전이다. 현재의 자경전은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고종 2년(1865년)에 자미당(紫微堂) 터에 조대비(趙大妃, 神貞翼皇后)를 위해 지은 것이다. 준공 후 고종 10년(1873년) 12월 화재로 인해 고종 13년 다시 세웠으며, 다시 불에 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재건하였다. 현존하는 침전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이다.

 

 

구조와 쓰임새

자경전과 청연루자경전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寢房)인 욱실을 둔 복안당(福安堂)은 겨울을 위한 공간인데 정면 5칸 반, 측면 2칸이다. 중앙부에 있는 정면 10칸, 측면 2칸, 전·후 툇간의 자경전은 낮시간에 거처하던 공간이고, 동남부의 다락집 청연루(淸讌樓)는 누마루가 돌출되어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이며, 동쪽의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 그리고 서쪽 뒤쪽에 정면 2칸, 측면 6칸의 방과 대청이 부속되어 전체적으로 'ㄴ'자형이며, 협경당은 시녀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전면 마당 동·남·서쪽에는 각각 동행각·남행각·서행각이 일곽을 이루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자경전 뜰 앞 좌측에는 돌짐승 조각상이 있고, 우측에는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건물의 중심되는 곳의 평면은 교태전과 같이 중앙에 커다란 대청을 두고 그 왼쪽과 오른쪽으로 커다란 온돌방을 둔 침전의 기본 형식을 갖추었다. 협경당 전면은 담으로 구획하여 자경전과 구분되지만, 후면은 건물이 한 몸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기단 높이와 지붕 용마루 높이를 자경전보다 낮게 하고 공포도 몰익공으로 간략하게 하여 자경전에 비해 격식을 낮추었다.

자경전 건물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였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직접 놓아 끝이 날카로운 수서를 낸 출목이 없는 이익공으로 결구되었고, 겹처마를 걸어 지붕을 받도록 하였다. 쇠서와 보머리에는 초각을 하였고, 안쪽으로는 조각된 보아지를 내었다. 주두 위에는 도리 방향으로 첨차를 놓아, 소로를 얹어 굴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있다. 도리 밑에 보 방향으로 화반을 놓아 도리를 받게 하였다. 가구(架構)는 앞면과 뒷면의 퇴주(退柱)와 안쪽의 고주 사이에는 툇보를 걸었으며, 내부의 두 고주 사이에는 대들보를 걸고 그 대들보 윗면에 우물천장을 가설하여 천장 속을 가리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합각면은 전돌로 마감하였다.

전면 중앙 3칸은 전퇴(前退)를 개방하여 마루를 깔았고 기타 부분과 청연루·협경당의 외부 기둥사이에는 모두 띠살창호를 설치하였다. 청연루 누마루는 높직한 돌기둥이 받치고 있다. 전면 기둥에는 주련(柱聯)을 달아 운치를 돋구었고, 후면에는 단(段)을 둔 쪽마루를 두었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을 하였으며, 취두·용두·잡상을 얹었다.

자경전 전면(前面)을 둘러싼 동·서·남 행각은 무익공(無翼工) 3량 구조로 내정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띠살문을 설치하였고, 외측벽은 두벌대의 장대석 위에 사괴석으로 아랫부분을 쌓고 그 상부에는 광창을 달았다. 남행각 중앙에는 정문인 만세문(萬歲門)이 나 있다. 자경전 후원(後園) 북쪽 담과 이어진 굴뚝에는 왕족의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는 십장생(十長生) 무늬가 베풀어졌고, 서쪽 벽돌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길상문자가 액자처럼 조성되어 있다.

 

 

▲ 자경전 뒤편의 출입문들

 

◇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景福宮慈慶殿十長生) 굴뚝

*보물 810호(1985년1월8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제작시기:조선 고종 2년 (추정)

 

경복궁자경전십장생굴뚝(景福宮慈慶殿十長生굴뚝)은 경복궁 자경전 뒤꼍 담의 중앙부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굴뚝이다.

이 굴뚝은 담보다 한 단 앞으로 돌출시켜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여 놓았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와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었다. 지붕면 위에는 10개의 연가(煙家)를 얹어, 자경전 건물의 10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여기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시설하였다.

 

 

  

 

 

굴뚝은 너비 381cm, 높이 236cm, 깊이 65cm이고, 제일 아랫부분 좌우에는 불가사리로 알려진 서수를 만들어 배치하였고, 그 위로 장방형 공간을 구획하여 태양·산·구름·바위·소나무·거북·사슴·학·바다·포도·연꽃·대나무·백로·불로초 등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윗부분에는 가운데에 용(나티), 그 좌우에 학을 새겨 놓았다. 해·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長壽),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富貴), 나티·불가사리 등은 악귀(惡鬼)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상징되고 있다. 십장생을 이와 같이 장식하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도자기·문방구류·베개모·자수·회사 등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원단에 궁궐에서 십장생도(十長生圖)를 걸어놓는 풍습이 있었다. 이 십장생굴뚝은 교태전(交泰殿) 뒤뜰 아미산(峨嵋山) 굴뚝과 같은 종류의 무늬를 갖고 있으나 아미산 굴뚝이 평면이 6각형인 독립 굴뚝임에 비해 이 굴뚝은 담장에 딸린 장방형 굴뚝인 점이 다르다. 현재 굴뚝 상부에 반투명한 소재를 사용하여 보호시설로 지붕을 꾸며 놓았다.

 

♧ 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輯敬堂)

▲ 함화당과 집경당 배치도 

 

▲ 출입문과 외부에서 바라본 전경

 

중궁전인 교태전 북쪽에는 흥복전과 여러 빈들의 거처인 후궁영역이 있었다.

이 영역과 관련있는 내전 가운데 함화당과 집경당이 남아 있는데, 외국 사신을 접견한 기록이 간간히 등장할 뿐 건물의 용도가 명확치 않다. 두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높은 복도가 남아 있어서 원래 궁궐의 복잡한 통로 체계의 흔적을 보여주며, 집경당에 돌출된 누마루에서 북쪽 향원전을 감상할 수 있다.

 

 

▲ 함화당과 집경당의 연결통로와 부 출입문과 연결되는 건물 사이의 통로

 

함화당(咸和堂)

 

▲ 함화당 전면 전경

▲ 함화당 후면 전경

 

집경당(輯敬堂)

 

▲ 집경당 전면과 후면 전경

 

◎ 연회와 재충전의 공간 - 후원(後園)

왕실의 희로애락을 껴안다!!!

'만 가지 일을 처리하는 여가에 책을 읽는다'고 한 정조의 말처럼 '만 가지 일'로 바쁜 왕과 왕실 가족들에게는 편안히 쉴 수 있는 휴식과 재충전의 공간이 필요했다.

경회루와 향원정은 경복궁의 여러 정원과 후원 가운데에 가장 주목받는 장소이다. 경회루는 연못 안에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지은 큰 누각으로, 주역 사상에 바탕을 둔 우주의 원리를 건축에 담고 있다. 왕이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열 때 이용하였다.

활 쏘기를 좋아한 세조는 경회루에서 연못 너머에 과녁을 설치한 후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하나도 연못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잘 쏘았다고 한다. 경회루는 어린 단종이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눈물로 옥새를 내어 준 곳이기도 하다.

경복궁 중건 당시 고종은 신무문 북쪽에 샘물과 정자, 누각을 갖춘 후원을 만들어 사용했다. 향원정은 경복궁 중건을 마친 뒤 건청궁을 지으면서 새롭게 만든 왕실 전용의 휴식 공간이다.

건청궁에는 구한말 서구 열강의 세력 다툼 속에 어지럽게 돌아가는 정세를 새로운 각오로 돌파하겠다는 고종의 의지가 어려 있다. 그러나 고종은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시애되는 참극을 겪은 뒤 경복궁을 떠났다. 이로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궁궐이 되었다.

최근에 건청궁이 복원되었으며, 왕과 왕비의 시신을 모신 관을 능으로 옮길 때까지 모시는 빈전으로 쓰인 태원전도 복원되었다.

 

♧ 경회루(慶會樓) 일대

◇ 경회루와 연못

*국보 224호(1985년1월8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경복궁 내)

*제작시기:조선 시대 1412년(태종 12년) 창건, 1867년(고종 4년) 재건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 시대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 대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지금의 경회루는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1867년에 새로 지은 건물로,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가 되는 크고 사각진 인공 연못 안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원래 경회루는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완성하였다. 태종은 창덕궁에서 정무를 보며 경복궁에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연회 장소를 마련하고자 이 누각을 지었다.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건물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 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건물이 잘 견디게 처리한 점, 거대한 건물을 이익공의 간결한 법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장소로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주변 경관으로 인왕산ㆍ북악산ㆍ남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처리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며 연못의 물과 섬을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개요

경복궁에 있는 경회루는 조선 시대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마다 연회를 베풀던 누각이다. 공포에 출목(出木)이 없는 이익공계로 팔작지붕에 2층으로, 규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 인공방지(方池)에 정면 7칸, 측면 5찬으로 총 35칸이다. 연못 속에는 4개의 장방형의 인공 섬들이 있다. 방지의 물은 지하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북쪽 향원지(香遠池)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로를 타고 동쪽 지안(池岸)에 설치된 용두의 입을 통하여 폭포로 떨어진다.

 

 

본래 모습

원래의 경회루는 경복궁 창건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짓도록 명하여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이 완성하였다. 그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돌기둥만 270여 년 남았던 것을 고종 4년 경복궁을 중창할 때 재건하였으나 옛날처럼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는 장엄은 베풀지 못하였다. 재건 후 130여 년이 지난 1999년 지붕 일부를 해체 수리하였다. 임진왜란 전의 경회루는 유득공(柳得恭)의 《춘성유기(春城遊記)》에 "남아 있는 경회루의 돌기둥은 그 높이가 세 길이나 되고 모두 마흔 여덟 개인데. . ."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흥선대원군 때 다시 지은 경회루와 같은 규모인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에는 48개의 돌기둥에 승천하는 용들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하며,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이 조성되어 전국의 화려한 꽃들을 심고 봉래궁(蓬萊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또 연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 놓고 황룡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 모습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 4월 20일에 새로 지은 건물로서 경복궁의 편전(便殿)인 사정전(思政殿)과 천추전(千秋殿)의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경회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가 되는 인공으로 만든 커다란 방형 연못 안 동쪽에 치우쳐 있는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건물 하층의 바닥은 네모난 전돌을, 상층 바닥은 장귀틀과 결합하는 동귀틀이 각 칸에 하나로 구성된 장판자를 깔았고, 동쪽과 서쪽에는 하층에서 상층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계단을 두었다. 1층 천장, 2층 마루의 귀틀 밑부분은 소란우물천장을 꾸미고 화려하게 단청해 놓았다. 경회루 서쪽으로 있는 네모난 섬 두 개는 당주(當洲)이며, 이곳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경회루는 둘레를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아 기단을 삼은 네모 반듯한 섬 위에 세워졌으며, 세 벌로 조성된 돌다리를 통하여 연결되는데, 남쪽의 것이 임금을 위한 다리다. 다리의 돌난간과 네 귀는 짐승 모양의 조각으로 장식되었고, 섬을 이루는 돌 기단 둘레에도 돌난간이 둘러있고, 모퉁이마다 돌로 조각한 12지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돌난간은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의 돌란대로 구성되었다. 기단의 서쪽으로는 계단을 두어 연못에서 배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의 경회루 1층 부분은 민흘림을 한 높은 사각 돌기둥이 외부 둘레에, 원형의 돌기둥이 내부에 배열되어 있고, 2층 부분은 나무기둥으로 조영되어 있다. 1·2층 바닥에는 모두 건물 공간 사용의 위계를 표시하기 위해, 바깥보다 안쪽의 바닥을 조금씩 높였고, 2층에서는 중앙부분의 바닥을 더 높여서, 외진-내진-내내진(內內陣)을 형성했다. 2층의 세 공간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공간의 위계를 명확히 했고, 필요에 따라 들어올려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토록 했으며, 상부에는 광창을 달았다. 현재 내진과 내내진 사이에 문은 없고, 문선만 있다. 2층 둘레로는 계자난간을 설치했고, 기둥과 창방 아래 부분에는 당초문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이 곳 2층에서는 북쪽으로 백악, 서쪽으로 인왕, 남쪽으로 남산을 멀리 볼 수 있어서 이 곳이 자연과 함께 하며 연회를 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2층 상부의 가구(架構)형식은 11량 구조로 복잡하게 구성되었지만,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결구되어 있다. 공포는 출목이 없는 이익공이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얹어서 하중을 균등하게 분포시켰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내부 공간의 규모에 비해 매우 거대하다. 팔작지붕의 내림마루ㆍ추녀마루ㆍ용마루는 모두 회반죽을 바른 양성을 하였는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만나는 부분에는 용두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와 잡상을 배열하였다. 사래 끝에는 토수를 설치했으며, 지붕 합각면에는 풍판과 쫄대를 사용하여 판벽을 구성하였다.

고종 때 재건된 경회루는 당시 유가(儒家)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건설되었는데, 그 내용은 정학순(丁學洵)이 경복궁 중건 후인 1865년에 쓴《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 나타나 있다. 1층 내부 기둥을 원기둥〔圓柱〕, 외부 기둥을 사각기둥〔方柱〕으로 한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나타낸다. 2층 기둥은 외진주만 사각기둥이고, 내진주는 모두 원기둥이다. 외진-내진-내내진 3겹으로 구성된 2층 평면의 제일 안인 내내진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고, 이 세 칸을 둘러싼 여덟 기둥은 천지 만물이 생성되는 기본인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상징한다. 제일 안 세 칸을 둘러싼 다음 겹인 내진은 12칸인데 1년 12달을 상징하고, 매 칸마다 네 짝씩 16칸에 달린 64문짝은 64괘를 상징한다. 가장 바깥을 둘러싼 24칸은 1년 24절기와 24방(方)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경회루는 당시 유가의 세계관을 건축 형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경회루에는 불을 잡아먹는 짐승인 불가사리 둘을 금속으로 제작하여 연못 속에 넣어 화기(火氣)를 막으려고 했다는 것을 정학순은 기록하였는데, 이 상징물 하나가 최근 경회루 방형 연못을 청소하면서 나왔다. 방형 연못 서북쪽으로 돌기둥 두 개가 물 속에 담겨 있는 육각형 평면의 하향정(荷香亭)은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건청궁(乾淸宮) 일대

 

◇ 향원정(香遠亭) 

 

▲ 향원정 연지의 전체 전경

 

 

 

▲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바라본 전경

 

향원정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층과 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특히 연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 향원정 열상진원샘 ))

 

 

 

이 샘은 경복궁 창건(1395년) 당시부터 있던 왕궁의 샘으로 옛날부터 물이 맑고 차서 음료수로 이용하였다.

글을 새긴 우물 뚜껑은 경복궁 중건(1868년) 때 만든 것이다.

샘에서 솟아난 물이 두 번 직각으로 꺾여서 연못으로 잔잔히 흘러들도록 만들었는데 이것은 향원지에 드리워진 정자와 꽃나무의 그림자가 물결에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비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꺾어지는 수로는 둥근 돌로 통로를 만들어 흐르는 물이 더욱 생기를 띠게 한다.

 

 

◇ 건청궁(乾淸宮)

 

경복궁 중건사업이 끝난 이듬해인 1873년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경복궁 북쪽 동산 정원인 녹산과 향원전 사이에 지어졌다가 을미왜변 직전 고종과 명성황후 거처로 사용되었다.

건청전의 건축양식은 궁궐의 침전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산림집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안채(곤녕합), 부속건물(복수당), 행각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선인 99칸의 2.5배 되는 250칸이다.

건청궁이 건립된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생활공간을 옮겼으며, 1884년 다시 건천궁으로 돌아와 10여년을 이곳에서 줄곧 지내다가 을미왜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한편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며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곤령합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에 들어와 경복궁의 건물들이 차례로 파괴되면서 건청궁은 1909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헐려 사라졌으며, 대신 그 자리에는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졌다. 이후 이 미술관은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 철거됐다. 건청궁 복원은 2004년 6월에 시작돼 3년여 만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어 2007년 10월부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곤녕합(坤寧閤) 명성황후의 침전이다.

 

 

▲ 장안당과 곤녕합의 연결 복도

 

옥호루

장안당(長安堂) 고종황제의 침전이다.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

 

관문각

고종의 서재. 원래 전통적 목조건물이었으나,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의 설계로 경복궁 안의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다.

 

 

 

▲ 건청궁 내의 방들

  

▲ 건청궁 출입문과 협문

 

◇ 집옥재(集玉齋)

 

▲ 집옥재 배치도와 전체 전경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서 기거했다. 이미 창덕궁에 지어졌던 집옥재, 협길당 등을 1891년에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와 자신의 서재 겸 전용도서실과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무문의 동쪽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건물의 측면 좌우 끝에 박공을 달아 벽면 상부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구조다. 기둥 위에 안초공을 사용했으며, 두공은 다포식으로 첨차의 내외와 양측면에 섬세한 파연초를 조각했다. 건물 전면의 툇간을 전부 개방하고, 양 옆벽을 박공마루까지 벽돌로 쌓고 내부를 중2층으로 만들었으며, 팔우정은 2층 정자이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풍의 요소들이 많이 섞여 궐내에서 이국적인 지역을 형성하며, 복도를 통해 하나의 내부로 연결되어 있다.

 

 

▲ 집옥재의 팔우정(左)과 집옥재와 협길당(右) 전경

 

팔우정(八隅亭)

집옥재(集玉齋)

협길당(協吉堂)

 

◎ 궁궐을 지켜주는 석물과 장식

궁월 곳곳에는 해태, 호랑이, 용, 봉황, 현무, 주작, 십이지신상 등 수백년을 말없이 궁궐을 지켜온 석물들이 있다.

이 석물들은 왕실의 권의와 위엄을 드러내주는 상서로운 존재로, 불과 물을 다스려 화재나 홍수, 가뭄같은 천재지변을 막고, 행복을 불러오거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알려져 왔다.

 

 

 

▲ 근정전 주변의 석조상들

 

궁궐에서 가장 많은 석물을 볼 수 있는 곳은 근정전의 월대이다.

계단의 좌우 소맷돌, 계단 기둥, 난간 모퉁이 등에 36마리가 놓였다. 왕권을 상징하거나 수호하는 역할에 맞게 충직하고 근엄한 모습을 보이지만 천진하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 석물도 있다. 선조들의 해학과 여유가 엿보인다.

 

 

▲ 경복궁 동쪽에 자리잡은 국립민속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