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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전 백제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부여 Ⅲ편(가림성과 대조사)

왕마구리 2012. 10. 7. 00:44

◀ 백제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부여 Ⅲ편) ▶

사비성의 외곽 방어성인 금강 하류의 성흥산 가림성!

거대한 미륵석불의 성흥산 대조사!

 

2008년 6월12일~13일 1박2일간 삼국시대의 옛 수도였던 신라의 경주 탐방, 2010년 6월17일 백제의 공주(옹진) 공산성과 예산의 임존성 탐방에 이어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사비)를 찾아 1400여년 전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1박 2일이란 짧은 시간 내에 넓은 부여군 전역에 흩어져 있는 백제시대의 유적지와 문화재 그리고 사적지들을 전부 돌아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사전에 탐방 가능한 곳을 미리 정하고 백제 역사 여행을 시작하였다.

부소산성, 가림성 등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적지,

무량사와 대조사, 정림사지 등 국가지정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는 사찰이나 옛 절터,

그리고 백제 무왕의 별궁 연못으로 추정되는 궁남지 등을 찾아 이번 옛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부여)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이번에 탐방한 유적지들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탐방한 유적지에서 아쉽게 놓쳐버린 것이나, 짧은 일정으로 찾지 못한 유적지는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재 방문을 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로 하고, 탐방기를 유적지 별로 정리하여 총 5편으로 나누어 작성을 해 보기로 한다.

 

-  Ⅰ편 <천년의 세월을 이어 온 고찰! 무량사(無量寺)>

-  Ⅱ편 <부여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객사와 관청! 홍산현 객사(鴻山縣 客舍)와 관아(官衙), 부여객사(扶餘客舍) 와 동헌(東軒)>

-  Ⅲ편 <사비성의 외곽 방어성인 금강 하류의 가림성(加林城)과 거대한 미륵석불의 대조사(大鳥寺)>

-  Ⅳ편 <왕실 별궁 연못인 궁남지와 사비시대 중심 사찰이었던 정림사지!>

-  Ⅴ편 <수도 사비의 중심 산성으로 백제 멸망의 비운의 장소! 부소산성(扶蘇山城)>

 

【 일 정 표 】2012년 9월 8일(토)-9일(일) 1박2일

                             ◈ 첫째날(9/8) : 무량사(외산면)-홍산현객사&관아(홍산면)-대조사&가림성(임천면)-궁남지(부여읍)-정림사지(부여읍)

                             ◈ 둘째날(9/9) : 부소산성&고란사-부여객사&동헌

 

 

【 부여 가림성(扶餘 加林城) 】

*사적 제4호(지정일:1963년01월21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성흥로97번길 167(군사리)

*면적:51,398㎡

 

 

 

                 ▲ 가림성(성흥산성) -출처:문화재청-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선(공주)와 사비성(부여)를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으로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23년(501) 8월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 한다.(부여 성흥산성으로 불리어지다가 2011년 7월28일 부여 가림성으로 변경, 고시되었다)

성의 형태는 금강 북쪽에 자리한 백제시대의 토축산성 보다 축소된 석축의 테뫼형 산성으로 지금까지 확인된 성의 둘레는 1500m, 성벽의 높이는 3~4m이며, 축조 방식은 일부는 외면에 화강암을 사용하여 대충 다듬은 석재를 수평으로 고임쌓기한 석축과 동벽 밖의 토축으로 되어 있다.

일부는 흙을 안으로 다져 내탁을 하고 외면을 석축하였으므로, 흙을 파낸 곳은 자연히 호를 형성하고 있다.

서쪽 성벽의 석축 부분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성벽보다 약 1.5m 정도 앞의 부분까지 넓혀서 기초를 만들었고 토축 부분은 산의 능선을 따라 지그재그 식으로 축조하고 있다.

남, 서, 북문지와 군창지, 우물터 3곳 및 토축보루의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 가림성의 주문인 남문지의 너비는 4m이며, 초석이 현존하고 있다.

성의 내부 정상은 약 600여평의 평탄한 대지가 되어 있으며, 이곳에 장대를 비롯한 주요한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축되고 있다. 성의 동쪽 안쪽에는 우물이 있어 오늘날에도 이용되고 있다.

남문지 앞에 있는 토성산에 둘레 약 200m의 토축 보루가 있는데, 이 토축 보루에는 부속된 작은 보루가 또 있다. 이와 같이 크고 작은 성이 쌍을 이루어 배치된 것은 백제 산성의 독특한 점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백제시대에 축조된 성곽 가운데 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성이라는 점과 옛 지명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성은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지였다고 하는데, 663년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유인궤가 이 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렵다고 한 것에서 난공불락의 요새지에 마련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중엽까지 사용하였던 산성으로 1996년 석성의 일부를 조사, 실시한 모양이다.

고려 초기에 장군 유금필이 견훤과 대적하다가 이곳에 둘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 성내에 있다.

 

▦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진 가림성 남문의 느티나무

드라마 '서동요'에서 무왕과 선화공주가 사랑을 약속하는 장면에 등장하면서 '사랑나무'라 불려지게 되었다.

 

 

==  서동요

SBS 월화드라마(50부작, 2005년09월05일~2006년03월27일)

백제 왕가의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기구한 운명으로 자신의 신분을 모른 채 삶을 살아가다,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화려한 인생을 살아간 백제30대 임금 무왕에 오르는 서동(조형재 분)과 신라 진평왕의 세째 딸인 선화공주(이보영 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장이와 선화공주가 연모를 키우고 신라궁에서 쫓겨난 선화공주를 위하여 공주의 집을 지어주고 백성의 길을 가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하여 서로의 사랑을 키웠으며, 나무의 나이테와 기후의 관계, 온돌 발견 장면을 촬영하였던 곳이다.

== 대왕 세종

김상경(세종 역), 이윤지(소헌왕후 역) 주연의 KBS 대하드라마(토,일 방영, 총86부작, 2008년01월15일~11월16일)

대왕 세종의 업적과 태평성대를 다루며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그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한 치열한 투쟁 중의 수 많은 고뇌를 보여준 드라마.

== 뿌리깊은 나무

한석규(이도, 세종대왕 역), 장혁(강채윤 역), 신세경(소이 역) 주연의 SBS 수목드라마(24부작, 2011년10월05일~12월22일)

이정명의 소살 "뿌리깊은 나무'를 드라마한 조선 세종시대 훈민정음 반포 전 7일간 경복궁에서 벌어지는 집현전 학사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

== 계백

조재현(의자왕 역), 이서진(계백 역), 오연수(사택비 역) 주연의 MBC 월화드라마(36부작, 2011년07월25일~11월22일)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장수 계백을 재조명한 퓨전 사극

== 여인의 향기

김선아, 이동욱 주연의 SBS 주말드라마(16부작, 2011년07월23일~09월11일). 로맨틱 코미디.

== 신의

SBS 월화드라마(24부작, 2012년08월13일~현재 방영중)

고려시대의 무사 최영(이민호 분)과 현대의 여의사 유은수(김희선 분)의 660년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과 진정한 왕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

드라마에 나오는 14세기 고려와 21세기 대한민국을 잇는 시간터널의 하늘문은 성 아래 대조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 앞이다.

 

▦ 가림성 성곽돌기

성흥산 중턱에 자리한 대조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보믈 제217호)과 경내를 탐방하고, 성흥산 정상에 쌓은 백제 시대에 축조한 성곽 중 축조연대가 유일하게 확실하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가림성으로 향한다.

400년 넘게 가림성과 함께 해온 느티나무인 사랑나무가 삼천궁녀의 한을 담아 옛 백제의 성도 사비가 위치한 북쪽에서 가림성 동쪽을 따라 남으로 예나 지금이나 세월의 무상함을 아는지 오늘도 강바람에 잔가지만 흔들며 1350여년 전의 백제 멸망을 아쉬워 하듯 묵묵히 흘러내리는 금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가림성 남문에 도착하여 넓고 평탄한 대지 우측 끝 성곽 위 길을 따라 옛 백제인의 혼을 찾아 가림성 성곽돌기를 시작한다.

 

【 성곽돌기 코스 】 가림성(성흥산성)입구/충혼사→전망바위→가림성 남문지/느티나무→성흥루갈림길/우물→가림성 동문지→한고개갈림길/서문지→산불감시초소&봉화제단/성흥산 정상→성흥루→유금필 장군 사당&유적지비→우물/원점회귀→가림성 남문/느티나무→가림성 입구

【 소요시간 】 약 1시간

 

 

                  ▲ 가림성(성흥산성) 입구 전경과 입구의 이정표

 

                 ▲ 가림성(성흥산성) 입구에 있는 충혼사

 

16:05=>가림성 입구

     매점과 약간의 공터 주차장이 있는 가림성 입구인 ┤자 갈림길에 이르면 충청남도의 도보여행길인 '솔바람길' 이정표(←산림욕장 대나무숲 0.5km, 호리동길/↑성흥산성 0.27km, 솔바람길/↓대조사 0.9km, 솔바람길)와 성흥산성 안내도.

 

 

                 ▲ 솔바람길 표식기와 안내 푯말

 

좌측 길 입구에는 '충혼사'가 자리를 하고 있다.

 

 

 

                 ▲ 가림성(성흥산성) 입구에서 올려다 본 가림성의 상징물인 남문 옆 느티나무(사진 上)

                     가림성 남쪽 성벽 아래의 암벽(사진 中)

                     가림성 남문으로 오르는 돌계단길(사진 下)

 

올려다 보이는 남문의 느티나무를 향해 가파르게 돌계단을 3분여 오르면 400년이 넘은 가림성의 상징물이 되어버린 느티나무가 문을 지키며 서 있는 남문 입구에 이르게 되는데, 넓은 바위에 몇 개의 물이 고여있는 구멍(웅덩이)이 뚫려있는 바위전망대를 대하게 된다.

 

 

 

                 ▲ 가림성(성흥산성) 남문 직전의 전망대(사진 上)

                     가림성 남문 직전의 바위 전망대에서 조망된 금강 일대의 전경(사진 中)

                     가림성 남문과 남문의 느티나무(사진 下)

 

전망대에 올라서면 남쪽 방향으로 시야가 트여 막힘없이 주변의 경치가 조망이 된다.

 

 

 

                 ▲ 가림성(성흥산성) 느티나무

 

가림성 남문지/느티나무

가림성 최고의 명소로 우측에 '해맞이 행사장' 표석이 있고, 금강 하류 일대를 포함하여 동,서,남쪽 방향으로 막힘없이 조망이 되는 곳이다.

 

                 ▲ 가림성(성흥산성) 느티나무 옆 해맞이행사장에서 바라본 전경

 

넓고 평탄한 대지(약 600여평 규모)가 펼쳐지는데, 가림성 축성 당시 이곳에는 군창지, 병영 등 군사시설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또한 이곳에서는 드라마 촬영으로 인해 사랑나무라는 별칭을 얻게 된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많은 드라마가 촬영된 곳이다.

 

                 ▲ 가림성(성흥산성)남문지에서 동문지으로 이어지는 성곽길

 

우측 성곽길을 따라 100여m를 따라가면 ┤자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이정표(←솔바람길 0.4km/↑성곽길)가 설치된 성흥루 갈림길이다.

솔바람길인 성흥루가는 길 입구에는 가림성 축조 당시부터 있었다는 우물이 있고, 언덕 위에는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사당 건물이 보인다. 성곽길을 돌아 좌측 성흥루 방향의 길을 따라 다시 이곳으로 원점회귀를 하게 된다.

직진 길을 따라 100여m를 더 진행하면 이번에는 성밖으로 길이 나있는 ├자 갈림길에 이르게 되는데 가림성 동문지이다.

 

 

                 ▲ 성흥루 갈림길의 이정표(사진 左)과 동문지의 이정표(사진 右)

 

가림성 동문지/├자갈림길

이정표(솔바람길, ↑서문 0.6km/↓대조사 1.25km/→성곽길 지장골)가 있다.

 

 

 

                 ▲ 성벽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성곽길

 

직진의 잡풀과 잡목으로 뒤덮혀 성벽의 흔적을 제대로 찾아 볼 수 없는 성곽길을 따라 내려가서 몇 차례의 짧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오르면 ┼자 사거리인 한고개갈림길에 이르게 되는데 옛 가림성 서문지이다.

 

 

 

                 ▲ 한고개갈림길인 가림성(성흥산성) 서문지(사진 上)

                     가림성 서문지의 이정표들사진 下)

 

가림성 서문지/한고개갈림길

이정표(←솔바람길/↑성곽길/↓성곽길/→솔바람길, 한고개 1.16km)와 푯말(→봉화제단, 성흥루, 유금필장군사당, 사랑나무), 그리고 솔바람길 안내도가 있다.

직진의 길을 따라 계속 성곽길을 따라 남문을 향해 내려가야 가림성의 복원된 성벽을 볼 수 있으나, 좌측의 솔바람길을 따라 남문으로 향하기로 한다.

3분여 후 잠시 오르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넓은 공터. 우측 끝에 '봉화제단' 표석이 보인다. 이곳이 가림성의 최고 높은 지대인 성흥산 정상인 것 같다.

 

 

                 ▲ 가림성의 가장 높은 지역인 성흥산 정상의 산불감시초소와 봉화제단

 

성흥산 정상(250m)

편안한 길을 따라 1분여 진행하면 성흥루.

 

                 ▲ 성흥루

 

누각 아래에는 유태사묘(유금필 장군 사당)과 유적지비가 있다.

 

▦ 유태사묘(庾太師廟)

*향토유적 제8호

 

 

 

                 ▲ 유금필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유태사묘

 

고려 개국공신이신 태사 유금필(~941)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장군은 황해도 평주 사람으로 고려 태조6년(923) 마군장군이 되어 북방 국경 골압진에 침입한 오랑케를 쳐서 평정하였고, 935년 도통대장군으로 후백제 왕인 견훤의 항복과 신라의 귀부와 더불어 3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우신 분이다.

후백제를 섬멸하신 뒤 남방을 다스릴 때 나라에 일이 생겨 고려 태조를 뵈러 가던 중 이곳 임천을 거치게 되어 한동안 머무러게 되었다. 그런데 온 고을이 패잔병들의 도둑질이 심한데다 악질이 퍼지고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겹쳐 백상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장군께서는 이 환경을 보시고 고을의 창고를 모두 열어 식량을 나누어 주고 둔전을 운영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선정을 베프시니 이곳 백성들이 감흡하여 생사당을 세워 장군의 공덕을 기려 지금까지 해마다 제사를 올려 왔다.

태조24년(941) 서거하시니 태조께서 충절이라 시호를 내리셨다. 그 후 조선 성종이 '태조유공지묘'라고 어필 현판을 내리셨다.

- 유금필 장군 사당 앞 안내문에서 -

 

 

                 ▲ 유금필 장군 유적지비(사진 左)와 백제시대부터 사용된 가림성 우물(사진 右)

 

잠시 내려가면 우측으로 넓은 대지와 느티나무가 보이는 우물이 있는 갈림길로 되돌아 오게 된다.

느티나무가 있는 남문지에서 가림성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1시간에 걸쳐 실시한 가림성 탐방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러나 성곽길을 한바퀴 돌아 가림성 남쪽에 복원해 둔 성벽의 전경을 감상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다.

 

 

                 ▲ 대조사와 가림성(성흥산성) 주변의 솔바람길 안내도

                 ▲ 주차장에서 대조사 경내로 오르는 계단길

 

【 대조사(大鳥寺) 】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760번지(성흥로197번길 112)

 

                 ▲ 대조사-신축중인 대웅전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에 있는 절이다.

'부여읍지'에 따르면 이 절은 인도에 가서 법본 율장을 가지고 돌아와서 백제 불교의 방향을 달리한 겸익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사적기를 참작하여 기록한 현판에 의하면 527년 담혜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어 대조사를 창건한 사람에 대한 설이 다소 다르지만 6세기 초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 뒤 이 절은 고려 원종 때 진전장로가 중창하였고, 1989년에 명부전, 1993년에는 종각, 1994년에는 미륵전을 각각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는 용화보전, 명부전,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현재 신축 중인 대웅전과 용화보전 뒷편에 위치한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보물 제217호로 지정되어 있다.

 

 

                 ▲ 용화보전

 

전설에 의하면 한 노승이 바위 밑에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한 마리의 큰 새가 바위 위에 앉는 것을 보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어느새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하여 있었으므로 이 절을 대조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절 마당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0호인 삼층석탑 1기가 있다. 옥개석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옥신이 발견되어 복원하였다.

대조사는 일주문, 사천왕문, 불이문 등을 일반 사찰과는 달리 세우지 않은 사찰이다.

 

 

♧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扶餘 大鳥寺 石造彌勒菩薩立像)

*보물 제217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760번지

 

 

 

 

고려시대에 유행한 석조미륵보살의 하나로 거대한 규모 뿐만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 개태사지 석조삼존불상(보물 제219호) 등과 함께 충청도 지방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 (참고)충청도 지방의 불상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사진 左)

                     개태사지 석조삼존불상-보물 제219호(사진 右)

 

미래 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인데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높이가 10m의 거대한 석불로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을 쓰고, 그 위에는 다시 이중의 보개를 올려 놓았는데 보개의 네 모서리에는 작은 풍경이 달려 있다. 관 밑으로는 머리카락이 짧게 내려져 있는데 이와 같은 머리모양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같다.

얼굴은 4각형으로 넓적하여 평면적이며, 양쪽 귀와 눈은 크나 코와 입이 작아서 다소 괴이하며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목에는 한 줄의 음각선이 있다.

각이 지고 넓은 양 어깨에는 여래상의 통견의와 같은 천의를 걸쳤는데 감싼 옷은 두껍고 무거워 보이며 옷밑의 불신은 전혀 드러나지 않아 매우 투박한 모습이다. 가슴에는 목걸이가 조각되었으나, 거대하고 평판적인 신체에 별 다른 장식적 효과를 주지 못하는 것 같다.

팔의 윤곽은 몸통에 붙어 옷자락으로 겨우 표현되었고, 손도 간신히 나타냈는데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대어 금속제의 연꽃가지를 잡고 있는데, 얇게 부조되어 입체감이 거의 없다.

대좌는 자연석이며 보살상 앞에는 제사 음식을 차려 놓기 위하여 약간 다듬은 판판한 돌로 상석을 마련해 놓았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고려 초기를 대표하는 석조각상으로 968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촉사 보살상과 크기나 형식, 그리고 양식까지도 거의 흡사한데 이중 보개를 얹은 높다란 원통형의 관, 그린 듯한 이목구비를 표현한 4각형의 얼굴, 장방형의 신체와 짧은 상체, 각이 진 어깨와 양감없는 체구, 갖다붙인 듯한 손, 두 어깨에서 내려진 세로 의문선 등은 관촉사 보살상의 수법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층 양감이 줄어진 점, 가슴의 구슬목걸이와 승각기, 때매듭 등의 표현에서 다소 도식화된 조각양식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조성연대는 다소 내려가는 보살상이라 하겠다.

불신이라기보다 거대한 돌기둥을 세워놓은 듯한 체구, 4등신에 가까운 신체의 비율, 원통형의 보관과 4각형의 보개 등은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였던 불교양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당시 지방양식을 반영하는 작품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조성연대는 12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미륵보살상의 위로 수고 15m에 수령 350여년 된 소나무가 우산을 들고 씌워 주듯 버티고 서 있는데 신비롭고 경이로운 느낌이 든다.

 

 

                 ▲ 용화보전을 통해 본 석조미륵보살입상

 

대조사의 용화보전은 불상을 모시지 않았는데 벽면을 대신하는 유리창을 통해 이 석조미륵보살상을 볼 수 있어,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용화보전의 주존불로 대신되고 있다.

 

 

 

 

 

 

 

 

 

 

 

 

 

 

 

 

 

 

 

♧ 부여 대조사 삼층석탑(扶餘 大鳥寺 三層石塔)

*충청넘도 문화재자료 제90호호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760번지

대조사 석불과 같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원래 이 탑은 지붕돌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부근에서 몸체돌을 발견하여 복원하였다.

이 지방에 있는 다른 탑과 달리 통일신라이후 유행한 3층석탑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형식을 보아도 신라 말 양식을 띄고 있다.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관하던 장소로 예배 대상이었으나 후에 금당 불상이 커지면서 절의 중요한 상징적인 시설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