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영남권

경북 북부 나드리 : 역사와 자연의 소리를 찾아서...(안동)한국의 역사마을! 하회마을(Ⅱ편)

왕마구리 2014. 3. 25. 01:02

빼어난 산수와 아름다운 옛 전통문화가 조화롭게 살아 숨 쉬는 경북 북부유교권은 우리 유교문화의 보고이자 친환경 웰빙여행의 천국이라 할 수 있다.

수려한 산과 계곡, 질 좋은 온천과 드넓은 동해 바다가 있어 어느 계절에도 다양한 레포츠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지역이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안동시, 영주시, 상주시. 문경시, 의성군, 청송군, 영양군, 예천군, 봉화군, 울진군 등이며, 이번 경북 북부 나드리는 1박2일 일정으로

상주시의 화달리 삼층석탑 및 전사벌왕릉, 경천대

예천군의 회룡포, 용문사, 초간정과 초간정원림, 금당실송림, 예천권씨초간종택, 그리고 개심사지 오층석탑

안동시의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등의 명소들을 방문하였다.

이번 탐방지는 각 지역별로 구분하여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일 정 표 】2014년 2월 20일(목)-21일(금) 1박2일

    ◈ 첫째날(2/20) : (상주)화달리 삼층석탑 및 전사벌왕릉-경천대-(예천)회룡포

    ◈ 둘째날(2/21) : (예천)용문사-초간정 및 초간정원림-예천금당실송림-예천권씨초간종택-개심사지오층석탑-(안동)하회마을-병산서원

 

역사의 향기와 전통의 숨결이 살아있는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安東)

경상북도 북단에 위치한 안동시는 시대별로 다양한 문화재를 고르게 보유한 한국의 대표적 전통문화의 고장으로 문화적 편향성을 가지지 않고, 시대적으로 종교적으로 어느 한 부분에 치우치지 않는 고장이다.

염상도사가 BC57년에 창녕국을 세웠다고 전해지는 안동은 신라시대는 고타야군, 고창군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에 안동부로 승격되면서 처음 안동으로 불리었다.

이후 명종27년(1197) 안동도호부, 신종7년(1204)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후에 복주목으로 바뀌고 공민왕10년(1361) 홍건적의 난 이후 다시 안동대도호부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안동대도호부로 병마절도부사를 두었으며, 고종33년에 안동군이 되었고, 1931년 안동읍, 1963년 안동시로 승격되어 안동군과 분리되었다가 1995년 1월에 안동시,군이 통합되어 전국에서 가장 넓은 기가 되었다.

삶의 생생한 모습을 간직한 목조문화재가 많아 옛 선인들의 생활문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관계로 다양한 민속문화가 삶 속에서 계승되어 오고 있다. 불교와 유교, 기독교 등 한국 문화사의 정신철학도 안동의 문화를 꽃 피워 안동문화의 이해는 곡 한국문화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며, 동양의 정신세계를 체험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안동시는 아시아태평양회원도시간 상호협의를 통한 관광진흥발전과 도시간 네트워크 강화를 위하여 2000년 설립된 아시아태평양도시관광진흥기구(TPO)에 가입하여 안동의 전통유교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있으며, 2004년 10월 27일 '세계역사도시연맹' 회원도시(전세계 59개국 95개 도시)로 가입하므로서 안동의 우수한 역사와 전통 문화적 가치를 세계인들에게 보다 폭 넓게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이 위치한 회원 도시(세계유산도시기구 OWHC 전세계 86개국 239개)로 구성된 유네스코 협력기구에 2006년 10월 2일 가입하였고, 하회마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2007년 7월 31일 등재됨으로 정회원 도시로 아시아에서 7번째로 승격, 가입되었다.

세계보편문화이며 각 문화의 특징을 드러내는 문화도구인 '탈' 관련 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여 안동의 화회탈,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이라는 기반을 통해 안동이 세계 탈문화를 선점, 선도하는 이미지를 확보하고 국제문화교류의 거점으로 인지시켜 나가기 위해 세계탈문화예술연맹을 안동시는 2006년 9월 29일 창립하였고, 매년 9월 마지막 주 금요일부터 10일간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 5개, 보물 39개, 중요무형문화재 2개, 사적 2곳, 천연기념물 7개, 명승 2곳, 중요민속문화재 28개, 등록문화재 1개 등 총 86점과 경상북도 도지정문화재인 유형문화재 69개, 무형문화재 5개, 기념물 20개, 민속문화재 53개, 문화재자료 70개 등 총 216점이 폭 넓게 산재해 있어 지난 해 7월9일~10일 1박2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일부 문화재들을 탐방하였고, 이번 경북 북부 나드리를 계기로 안동을 재 방문하여 한국의 미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하회마을'과 사적 제260호로 지정된 '병산서원' 탐방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탐방한 안동의 명소들은 아래와 같이 3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 한국의 역사마을!  안동하회마을(安東河回마을) : (Ⅰ편)탐방코스 내 국가지정문화재들

- 한국의 역사마을!  안동하회마을(安東河回마을) : (Ⅱ편)기타 국가지정문화재들 

- 유교문화의 본향  병산서원(屛山書院)

 

◀ 한국의 역사마을! 안동하회마을(安東河回마을) 

Ⅱ편.기타 국가지정문화재들

한국의 미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

UNESCO 세계유산

【 하회마을(河回마을)

*중요민속문화재 제122호(1984년01월14일 지정)

*면적:1,343필지/7,200,660㎡

*소재지: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고려 말 풍산류씨 입항시조인 류종혜가 이주하여 터를 잡은 이래,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대인 16세기에 이르러 기반을 확고히 하여, 풍산류씨가 600여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다.

류씨가 집단 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 안씨 등이 씨족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와가와 초가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학자인 류운룡 선생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 형제가 자란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라고 한 것은 낙동강이 하회마을의 동,남,서를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독특한 지형적 형상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물이 휘돌아 태극형, 연꽃이 물에 떠 있는 듯한 형상의 연화부수형, 배 모양을 닮아 행주형에 해당하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327m의 화산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크게 남촌과 북촌으로 나눌 수 있고, 수령이 600여 년 된 삼신당 느티나무가 있는 지역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삼신당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들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또한 큰 와가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는데, 특히 별신굿에 쓰이던 탈들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제작연대를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가 뿌리 깊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멋스러운 경치에 민속과 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연구, 보존, 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 UNESCO 세계유산 』

2010년 7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경주 양동마을과 함꼐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10가지 등재기준 중

(씨족마을의 진정성과 완잔전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전적과 고문서, 유교의례, 마을신앙, 민속놀이 등 양반문화와 마을문화를 살피는 증거),

(인류역사의 단계를 잘 보여주는 건조물, 건축적 경관의 탁월한 사례:유교적 건축물은 조선시대 건축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예술적 가치를 잘 보여줌),

(환경과 사람의 상호작용을 대표하는 전통적인 사람 정주지의 탁월한 사례:풍수를 이용한 자연지형의 극적인 활용, 유교사회의 전통적 정주지의 탁월한 사례로 급속한 도시화, 현대화로 훼손될 위험성에 대응, 보존의 필요성),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살아있는 전통, 사상, 예술적, 문화적 작품관 연계:조선시대 유교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의 기준에 의해 우리나라 열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등재결의안에서 '한국의 역사마을:하회, 양동'은 주거 건축물과 정자, 정사, 사원 등 전통 건축물들의 조화와 그 배치 방법 및 전통적 주거문화가 조선시대의 사회 구조와 독특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지속되고 있는 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문집, 예술작품과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 및 문화적 성과물과 공동체 놀이, 세시풍속 및 전통 관혼상제 등 주민들의 생활과 신앙에 관계된 무형유산이 세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는 점도 높이 평가하였다.

하회마을이 세계유산 등재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으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들의 삶 자체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 하회마을의 국가지정문화재들

- 국보(2개)

   *국보 제121호 : 하회탈 및 병산탈 12종 13점  *국보 제132호 : 징비록

- 보물(4개)

   *보물 제306호 : 안동 하회 양진당     *보물 제414호 : 안동 하회 충효당

   *보물 제460호 : 유성룡 종가 유물     *보물 제160호 : 유성룡 종가 문적 11종 22점

- 사적 제260호 : 안동 병산서원

-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 하회별신굿탈놀이

- 중요민속문화재(10개)

   *중요민속문화재 제 90호 : 하회 남촌댁        *중요민속문화재 제 91호 : 하회주일재

   *중요민속문화재 제 84호 : 하회 북촌댁        *중요민속문화재 제 85호 : 하회원지정사

   *중요민속문화재 제 86호 : 하회빈연정사      *중요민속문화재 제 87호 : 하회풍천류씨 작천댁

   *중요민속문화재 제 88호 : 하회옥연정사      *중요민속문화재 제 89호 : 하회겸암정사

   *중요민속문화재 제122호 : 안동하회마을     *중요민속문화재 제177호 : 하회동하동고택

- 천연기념물 제473호 :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 숲

 

▣ 탐방코스

하회마을 종합안내소/셔틀버스 정류장→하회마을 안내판→하동고택→남촌댁(염행당)→양오당(주일재)→북촌댁(화경당)→삼신당 신목→양진당→충효당→작천고택(류시주가옥)→빈연정사→만송정 솔숲→나루터/부용대→하회마을 종합안내소

 

하회마을의 문화재들은 탐방코스 순서대로 탐방하였던 국가지정문화재를 (Ⅰ편)에, 탐방 코스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국립중앙박물관, 한국국학진흥원 등에 보관되어 있는 문화재와 무형문화재 등은 문화재청의 자료를 인용하여 (Ⅱ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또한 사적 제260호인 병산서원도 별도로 나누어 총 3편으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또한 하회마을의 고택들은 현재 후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라, 내부 탐방이 제한적이라 직접 확인을 할 수가 없었으며, 자료와 사진 등을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등재된 것을 인용하였다.

먼저 탐방을 실시하였던 탐방코스의 문화재들을 우선 소개를 하고, 이어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문화재들을 문화재청의 자료를 인용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安東 河回탈 및 屛山탈)

*국보 제121호(1964년03월30일 지정)

*수량:하회탈 11개, 병산탈 2개/총 13개

*소재지:국립중앙박물관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과 그 이웃인 병사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탈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놀이 가면이다.

하회탈은 11개가 전해지는데 주지 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탈이 있다. 이밖에 총각, 별채, 떡다리 탈이 있었다고 하나 분실되어 전하지 않아서, 병산탈로는 현재 2개가 남아 있다.

한국의 가면은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든 것이 많아서 오래 보존된 예가 드물며, 그 해 탈놀이가 끝난 후 태워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하회탈과 병산탈은 드물게 보이는 목조탈이며, 격식과 세련됨을 갖춘 유물이다.

원래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거행되는 별신굿에 쓰이던 것이며, 마을마다 따로 가면들을 보존해 왔을 뿐만 아니라 탈에 대한 금기나 제약이 매우 엄격하였다. 탈의 재료는 오리나무이며, 그 위에 옻칠을 두겹 세겹으로 칠해 정교한 색을 내고 있다.

턱은 따로 조각되어 있어서, 아래턱을 노끈으로 달아 놀이할 때 움직이게 함으로써 생동감을 주도록 되어 있다. 하회 가면 중에서도 양반과 백정은 세련된 입체감과 표현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이 탈들의 제작자와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는 허도령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다만 하회마을에 살았던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허씨가 살았고, 안씨 집안이 들어온 후, 류씨가 조선 전기에 갈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 하회 별신굿탈놀이(河回 別神굿탈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1980년11월17일 지정)

별신굿이란 3,5년 혹은 10년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섣달 보름날(12월15일)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무진생(戊辰生) 성황님에게 별신굿을 해왔으며, 굿과 더불어 성황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탈놀이를 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각시가 무동마당,주지마당,백정마당,할미마당,파계승마당,양반과 선비마당,혼례마당,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대내림을 하는데, 정월 초이튿날 아침 성황당에 올라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성황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성황대에 옮겨 달고 산에서 내려온다. 성황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면 비로소 놀이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로는 주지승,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이 있다.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번에 대한 신랄한 풍자,해학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제사 의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외에서는 볼 수 없고ㅡ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놀이에 사용되는 탈은 주지탈 등을 포함하여 10종 11개로 오리나무로 만들었으며, 옻칠과 안료를 두세겹 칠하여 색조의 강도를 높였는데, 원본은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로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이의 반주는 꽹가리가 중심이 되는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뒷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이나 기원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1969년11월07일 지정)

*수량:1책

*소재지: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조선 중기의 문신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 문학, 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징비록을 저술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류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전란 중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재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필사본 '징비록'은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25년(1647)에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이것은 숙종21년(1695) 일본 경도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었으며, 1712년에는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았다.

이 책은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난중일기'와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 류성룡 종가유물(柳成龍 宗家遺物)

*보물 제460호(1967년07월15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종가길 69(영모각),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일부 위탁 보관)

서애 류성룡의 종손가에 전해오는 유물로서

첫째, 류성룡 선생이 직접 쓰던 것

둘째,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곤문기

세째, 조정에서 선생에게 내린 여러 문서들 등 세가지로 구분된다.

유물 가운데 선생이 쓰던 것으로는 갑주와 가죽으로 만든 신발인 혁화, 상아로 만든 홀(笏:신하가 임금을 볼 때나 종묘사직에 제사지낼 때 예를 갖추기 위해 두 손에 모아쥐던 패), 갓끈, 관자, 몸에 늘 지니고 다니면서 보던 '동국지도' 등 총 7종이며,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는 자식들에게 재산과 노비를 분배한 기록인 분재기로 매우 희귀한 예이다.

조정에서 내림 고문서는 녹권과 교지 및 제문 등 총 14종이다.

이 유물들은 류성룡 선생의 개인사 연구 및 당시의 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류성룡 종가유물-류성룡 유물(柳成龍 遺物)

*보물 제460-1호

 

 

조선 중기 문신인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종손가에 전해오는 유물들 가운데 류성룡 선생이 직접 사용하던 것이다.

갑주 1구, 혁화 1족, 상아홀 1개, 갓끈 4종, 관자 2종, 유서통 1개, 동국지도 서애 선생 수택본 1점 등이다.

갑주는 크고작은 철편을 가죽 끈으로 연결한 것으로 1구이다. 앞면에 반달 모양의 가림이 있고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으나, 갑옷은 심하게 손상되어 있다. 혁화는 가죽신으로 두꺼운 가죽을 옆에 대고 바닥은 5중으로 꿰매었다.

홀이란 신하들이 임금을 뵐 때나 종묘사직에 제사지낼 때 예를 갖추기 위해 두 손을 모아서 쥐던 패를 말하며, 상아로 만든 홀은 41cm로 젖빛이다.

관자는 금관자 1개와 옥관자 6개이다. 상급자가 부하에게 내리는 명령서인 유서를 담았던 통은 왕대나무의 마디 하나를 잘라서 이용한 것이다.

현재 이 유물들은 모두 종손가의 유물전시관인 영모각에서 일반인들에게 전시하고 있다.

♧류성룡 종가유물-류성룡 모부인 분깃문기(柳成龍 母夫人 分衿文記)

*보물 제460-2호

류성룡 선생 어머니의 곤문기로, 크기는 가로 362cm, 세로 67.2cm이다.

한지에 행서체로 쓰였는데, 여러 곳이 벌레로 인해 훼손되었다. 이 문서는 선생 어머니의 분재기로 매우 희귀한 것인데, 분재기란 재산과 노비를 자식에게 나누어 주면서 이를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류성룡 종가유물-고문서(古文書)

*보물 제460-3호

조정에서 류성룡 선생에게 내린 여러 문서들 모아 놓은 것으로, 교지 및 교서, 제문 등 총 14종이다.

한석봉이 썼다고 전하는 '광무공신록권'은 1590년에, '광무공신과록권' 2매는 각각 1605년, 1606년에 선생이 공신에 오르면서 받은 문서이다. 교지는 나라에서 조비를 받았을 때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았을 때, 부원군에 올랐을 때 각각 받은 것들이다.

제문은 선조와 광해군, 그리고 정조가 각각 선생이 죽은 후 그의 뜻을 기리고자 내린 문서들이며, 이 문서들은 류성룡 선생의 개인사와 가계사, 그리고 조선시대 공문서 양식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류성룡 종가문적(柳成龍 宗家文籍)

*보물 제160호(1963년01월21일 지정)

*수량:11종 22점

*소재지: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서애 류성룡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온 문헌 및 각종 자료들이다.

이 문서들은 임진왜란 때 도테찰사로 임금을 호종하면서 군무를 총괄하던 류성룡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기록과 임진왜란과 관련되는 문건, 자료 등을 일괄하여 지정된 것이다.

그 목록들은

『진사록 』 3책, 『난후잡록』 2책, 『근폭집』 2책, 『중흥헌근』 1책, 『군문들록』 1책, 『정원전교』 2책, 『정조어제당장서화첩제문부 채제공발』 2책,

『당장시화첩』 1책, 『당장서첩』 2책, 『류성룡비망기입대통력』 5책, 『호성공신록훈교서』 1축 등 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당초 '안동류씨문서'로 지정되었다가 199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징비록』 초본이 포함되었으나 국보로 승급되어 16종 19권이 지정되었다.

 

♧류성룡 종가문적-진사록(辰巳錄)

*보물 제160-1호

*수량:3책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는 일기나 초고본 등을 모아엮은 『조선사료총간』 중에 실려 있어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사료총관』은 1932년부터 1944년에 걸쳐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사』 편찬과 함께 간행한 것이다.  

♧류성룡 종가문적-난후잡록(亂後雜錄)

*보물 제160-2호

*수량:2책

류성룡 선생이 임진왜란에 대하여 손으로 직접 쓴 책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임진왜란을 회고하며 그 승패와 전쟁의 자취 등을 기록한 글이다.

 

 

 

♧류성룡 종가문적-근폭집(芹曝集)

*보물 제160-3호

*수량:2책

『징비록』 가운데 제3권부터 제7권까지의 군국기무 10조 및 소차(疎箚 : 상소문과 간단한 형태의 상소문) 약간편을 간추려 편찬한 것이다.

 

 

  

 

♧류성룡 종가문적-중흥헌근(中興獻芹)

*보물 제160-4호

*수량:1책

『징비록』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일부만 간추려 복사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류성룡 종가문적-군문등록(軍門謄錄)

*보물 제160-5호

*수량:1책

군대 업무에 관한 공문을 모아 엮은 책으로, 선조28년(1595)~선조29년(1596)의 2년간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 업무는 제찰사가 주관하는 일이어서 책머리에 '도제찰사군문등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류성룡 종가문적-유지(有旨)

*보물 제160-6호

*수량:2첩

'유지'인 『장원잔교』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당시 영의정이며, 도제찰사이던 류성룡에게 내린 전교를 모아 엮은 책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7월 27일 부터 1593년 2월 1일까지 그 기간동안 내린 전교문을 등사한 것이다. 그 내용은 명나라에서 보내온 구원병에 대한 접대, 군량조달문제, 왜병 토벌에 대한 작전방략문제, 왜병의 선왕능침발굴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해 왕의 의견을 내리고 선후책을 상의한 것이다.

♧류성룡 종가문적-정조어제당장서화첩제문(正祖御製唐將書畵帖題文)

*보물 제160-7호

*수량:2책

정조 임금이 류성룡 선생 후손들에게 명하여 『당장시화첩』을 들여다보고 여기에 그 소감을 기록한 것이다. 부록으로 체제공의 발문을 함께 수록하였다.

 

 

 

♧류성룡 종가문적-당장시화첩(唐將詩畵帖)

*보물 제160-8호

*수량:1책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구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들의 시와 그림을 모아서 하나의 첩으로 엮어 만든 것이다. 

 

♧류성룡 종가문적-당장서첩(唐將書帖)

*보물 제160-9호

*수량:2책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구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들의 글씨와 편지 등을 모아서 하나의 첩으로 엮어 만든 것이다.

 

♧류성룡 종가문적-류성룡비망기입대통력(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

*보물 제160-10호

*수량:5책

당시에 사용하던 역서인 대통력에 류성룡이 필요한 주요사항 등을 해당 날짜 아래에 적어넣은 것으로, 역사적 자료로도 중요하지만, 또한 관상감에서 발행한 오래된 역서라는 점과 인쇄에 사용한 관상감활자를 연구하는데에도 귀중한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류성룡 종가문적-류성룡 호성공신교서(柳成龍 扈聖功臣敎書)

*보물 제160-11호

*수량:1축

공신록권이란 나라에서 공이 있는 신하에게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를 말하는데, 이 교서는 임진왜란 때에 선조 임금을 모시고 의주까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록권이다. 류성룡은 당시 2등공신에 책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