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한려수도의 관광명소! 보물섬 남해(南海) 제Ⅱ편:금산과 보리암

왕마구리 2014. 5. 3. 01:56

◀ 한려수도의 관광명소! 보물섬 남해(南海)를 찾아서

이번 탐방은 고교 동창들의 모임인 산우회 봄나들이 행사로 기획된 1박2일간의 탐방으로 예년의 벚꽃 만개시기에 맞추어 벚꽃으로 유명한 경남 하동의 쌍계사 십리벚꽃길과 인근의 관광지(화개장터와 최참판댁), 그리고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섬인 보물섬 남해를 찾아 '남해12경'을 위주로 관광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첫째날 이루어진 쌍계사 십리벚꽃길은 이상 고온으로 예년보다 빠른 시기에 벚꽃이 개화하고 만개하는 바람에 꽃이 지고 말아, 신록의 벚나무길을 잠시 걸어보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했다. 또한 최진사댁은 몇 차례 탐방을 한 곳이라 회원들만 탐방을 시키고 인근의 자전거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대여하여 혼자서 30여분간 평사리들판을 하아킹하는 색다른 체험을 하였았다.

남해 탐방에서는 첫째날 맑은 날씨속에 순조롭게 남해12경 중 세 곳을 탐방하였으나, 둘째날은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하며 흐린 날씨가 이어져 '남해 제1경'인 금산과 보리암 탐방에서 남해 앞바다와 기암괴석들로 뒤덮힌 금산의 절경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십수년만에 다시 금산 정상에 서는 감회를 맛 볼수가 있었다.

보물선 남해는 주변 지역 탐방 계획을 세워 다시 한 번 더 탐방을 하기로 하고, 그때 이번에 일부만 탐방한 남해12경을 제대로 탐방하기로 하며 아쉬움을 접기로 한다.

이번 1박2일간의 '하동 & 남해' 탐방은 남해에서 탐방한 관광명소만 소개하기로 하고 관광명소별로 나누어 총 7편으로 작성을 한다.

 

                  ▲ 보리암과 금산 등산로 입구에서 바라본 보리암

 

【 남해(南海) 소개 】

장수의 고장으로 이름난 남해는 지석묘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삼한시대에 남쪽 변한의 12개 부족국가 중 군미국 또는 낙노국에 속하였다고 추측된다.

삼한시대를 거쳐 가야시대에는 6가야 중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진주 관할인 고령가야에 속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남해가 사적자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 신문왕7년(687)이다. 신라는 남해도를 전야산군이라 칭하고 청주(현 진주) 관할에 두어 태수를 지방장관으로 하여 2개현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후 경덕왕16년(757)에 단행된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해군으로 개칭되었고 강주(현 진주)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9년(1018)에는 대대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남해현이라 개칭하고 현령을 두었다. 그 후 고려 말기부터 왜구들이 남해안 일대를 약탈,살생을 자행함에 따라 정상 행정 수행이 불가능하여 공민왕(1351~1353) 때에는 진주관내 대아천 부곡으로 행정관서를 옮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태종13년(1413)에 행정구역이 남해현은 일시 하동과 병합하여 하남현이 되었다가 하동현이 독립함에 따라 진주의 금양부곡과 합쳐져서 해양현이 되었고, 그 후 금양이 진주에 병합됨에 따라 남해현으로 복귀하였다.

당시의 행정관할은 경상도 우도에 속했으며, 종2품의 경주부윤 정3품의 창원대도호부사, 정3품의 진주목 밑에 종5품 현령의 소관으로 되어 있었고, 그 후 세조 원년에 지방방위조직을 일신하고 세조12년(1446)에는 관제개혁과 더불어 남해지방군은 진주진관진주목사인 첨절제사 휘하에 남해현령이 절제도위 금위로 관장하고 있었으며, 한편 수군은 제포진관 응천첨사 휘하에 평산포만호가 관장하고 있었다.

선조15년(1592)부터 임진,정유왜란의 전란지로 7년간은 거의 무인지경이 된 적도 있었고, 고종32년(1895)에 남해현이 남해군으로 개칭되었다. 1906년에는 진주목에 속해 있던 창선도가 남해군으로 편입되어 8개 면으로 되었다. 1973년 이동면의 갈도가 통영군에 편입되었고, 1979년 남해면은 읍으로 승격되어 1읍 7면이 되었으며, 1986년 4월 1일 이동면 상주출장소가 상주면으로, 삼동면 미조출장소가 미조면으로 승격되어 1읍 9면이 되었다.

2013년 12월 말 현재 면적은 경상남도의 약 3%인 357.66㎢이며, 이중 78.9㎢가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인구는 47,244명으로 인구는 줄면서 가구 수는 늘어나는 추세이며, 65세 이상의 인구가 증가하여 장수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연평균 기온은 15.2º로 온화한 해양성 기후이며,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연평균 강수량은 1,730㎜내외에 평균습도는 64%이다.

1읍 9명 222개리로 유인도 3개와 무인도 76개로 이루어져 있다.

 

                  ▲ 금산 정상에서

 

◈ 남해 12경

이번 관광에서 탐방한 곳(남해1경~6경)을 제외한 나머지 명소(남해7경~12경)는 간략하게 설명을 부연한다.

▷ 제 1경 : 금산과 보리암

    (금산 38경) 1.망대, 2.문장암, 3.대장봉, 4.형리암, 5.탑대, 6.천구암, 7.이태조기단, 8.가사굴, 9.삼불암, 10.천계암,

                   11.천마암, 12.만장대, 13.음성굴, 14.용굴, 15.쌍홍문, 16.사선대, 17.백명굴, 18.천구봉, 19.제석봉, 20.좌선대,

                   21.삼사기단, 22.저두암, 23, 상사바위, 24.향로봉, 25.사자암, 26.팔선대, 27.촉대봉, 28.구정암, 29.감로수, 30.농주암,

                   31.화엄봉, 32.일월봉, 33.흔들바위, 34.부소암, 35.상주리 석각, 36.세존도, 37.노인성, 38.일출경

▷ 제 2경 : 남해대교와 충렬사

▷ 제 3경 : 상주 은모래Beach

▷ 제 4경 : 창선교와 원시어업 죽방렴

▷ 제 5경 :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유적

▷ 제 6경 : 가천 암수바위와 남면해안

 

 

▷ 제 7경 : 노도 서포 김만중선생 유적

                현재 16가구, 43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 노도. 섬에서 바라보는 금산의 절경과 앵강만의 풍광 못지 않게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작가 서포 김만중이 56세의 일기로 유형의 삶을 마감했던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벽련(碧蓮). 말 그대로 짙고 푸른 연꽃, 3천년만에 핀다는 우담바라의 마을 바로 앞 삿갓처럼 생긴 섬이 노도이다.

서포가 생을 마감한지 300여년이 지난 지금 노도에는 그가 직접 팠다는 샘터와 초옥터, 그리고 허묘가 남아 그의 자리를 쓸쓸히 메우고 있다. 조선 후기 문신이며, 소설가요, 시인으로서 한시대를 풍미한 대 문호 서포의 발자취가 그 고뇌스러운 일생과 함께 서려 있는 남해의 작은 섬 노도는 유배문학의 산실이다. 남해는 서포 김만중 이외도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자암 김구 선생이 13년간 기나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섬으로 들어가는 길이 어렵지만 벽련마을 안에서 어선을 이용하면 쉽게 섬에 갈 수 있다.

 

▷ 제 8경 : 송정 솔바람해변

                상주 은모래해변에서 동쪽으로 4km, 미조초등학교에서 북서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있는 해변으로 특색있는 남국의 정취, 환경적으로 완벽한 해수욕장의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하다. 남해군은 1999년 7월 송정생태주차공원을 개장하고, 해수욕장 주변 가로등에 꽃바구니를 설치했다. 해수욕장을 운치있고 낭만적인 공원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부드럽고 은빛이 나는 백사장과 명경지수같은 바닷물이 송림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고,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맑은 바닷물과 송림으로 유명한 이곳은 서남향의 부드럽고 은빛나는 백사장 앞으로 탁트인 남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찾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열어 준다.

백사장 길이 1,500m, 폭 90m, 면적은 15,120평에 이르며, 수온은 연평균 18º이다.

송정의 또 다른 매력은 해수욕장을 조금만 벗어나면 커다란 돌덩이 같은 몽돌과 기암괴석이 뒤섞인 단애의 해안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수욕을 한 후, 때묻지 않은 자연의 청량감을 느껴 볼 수 있는 송정 솔바람 해변 부근은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관광지 지정을 받고, 경상남도와 남해군은 해변을 비롯한 주변 25만평의 부지를 2011년까지 714역원을 투자하여 공공시설에 숙박시설, 그리고 야영장, 휴양소, 전망대를 만들어 국제적인 해양휴양지로 개발할 계획이다.

 

▷ 제 9경 : 망운산과 화방사

                 1981년 화재로 소실된 이충무공의 목관 묘비가 복원되어 있는 화방사는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때 순국한 장병들의 영혼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호국사찰이다. 법전사물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화방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인 산닥나무 자생지가 있는 교육의 장이다. 화방사에서 망운암으로 오르는 숲길 등반은 산사체험을 곁들인 멋진 산책코스이다. 망운암은 정상 가까이에 있는 조그만 암자로 아무렇게나 세운 듯한 돌일주문을 무심으로 지나면 중병을 낫게 한다는 영험의 기도 도량이다.

남해 바다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망운산(786m).

화방사의 정적을 뒤로 하고 산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점점아 떠있는 작은 섬들과 강진만, 청정해역의 서상 앞바다, 지리산, 여천공단, 여수, 사천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가장 먼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상주 앞바다의 세존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정상 반대편 연대봉애는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5월에는 철쭉군락지의 꽃들이 만개해 붉게 타오르는 화려한 면모를 선보이며 등산객들을 현혹한다. 최근에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도 인기를 얻고 있어 전국 동호인들이 많이 찾고 있다. 화방사에서 차를 세우고 정상까지 등반할 수 있으며, 망운암과 정상까지 갈 수 있는 임도가 있어 차를 타고도 갈 수 있다.

 

▷ 제10경 : 물건방조어부림과 물미해안

                물건방조어부림은 태풍과 염해로부터 마을을 지켜주고 고기를 모이게 하는 어부림으로 길이 1.5km, 너비 30m의 반달형으로 팽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푸조나무인 낙엽수와 상록수인 후박나무 등 300년 된 40여종의 수종이 숲을 이루고 있어 천연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마을 뒤편에는 50년대 광부와 간호사로 머나먼 이국 땅 독일로 건너가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조국 근대화의 큰 주역이었던 우리 동포들에게 고국에서 노년을 보내고 정착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고 있는 독일마을이 위치해 있는데 건축방식에서부터 생활여건이 독일식으로 꾸며져 있어 이국적인 풍경을 접할 수 있다.

물미해안도로는 물건과 미조를 잇는 해안도로로 미조-초전-항도-가인포-노구-대지포-은점-물건으로 이어지는 꾸불꾸불한 해안도로의 경치를 만끽하며, 지나는 마을마다 간직한 전설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내항도, 외항도의 쌍둥이 섬을 가진 항도마을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사량도, 두미도, 욕지도는 물론 가까이에 마안도, 콩섬, 팥섬 등 남해바다의 온갖 섬들을 바라 볼 수 있고, "어짐을 더한다"는 포구, 가인포는 중국사람이 지나가다 밥 한 상을 대접받고 지어주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노구에서 대지포까지는 아홉 구비로 일컬어지는 수많은 고개가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이다.

 

▷ 제11경 : 호구산과 용문사

                용문사는 미륵이 탄생하여 맨 처음 몸을 씻었다는 용소마을 위쪽의 호구산 계곡에 호젓하게 자리잡고 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금산에 보광사를 짓고, 뒤에 호구산에 첨성각을 세우고 금산에 있던 보광사를 옮겼다고 한다.

전국 3대 지장도량의 하나로 불리는 용문사의 독특함은 천왕각의 사천왕이 짓빏고 있는 양반과 탐관오리이다. 그런 모습에서 우리는 권력을 탐하지 않고 오직 민초들의 곁에 있고자 했던 용문사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용문사는 남해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절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수많은 용조각이 새겨진 대웅전, 용화전에 모셔진 화강암으로 된 고려시대의 용문사 석불, 조선 인조때의 시인 촌은 유희경 선생의 촌은집 책판 52권을 비롯하여 문화재자료 천왕각, 명부전이 있다. 그리고 문화재로는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총구가 세 개인 삼혈포와 용문사가 호국사찰임을 표시하는 숙종이 하사한 수국사금패, 궁중매듭 번 등이 용문사가 자랑하는 문화재이다. 산내 암자로 백련암과 염불암이 있다.

특히 백련암은 수행처로 이름 나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용성스님,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 성철 스님이 머문 곳으로 유명하다.

 

▷ 제12경 : 창선~삼천포대교

                총 연장 3.4km에 이르는 5개의 창성.삼천포대교. 세계에서 보기드문 다리의 향연!!!

2003년 4월 28일 성웅 이충무공 탄신일을 기하여 1973년 남해대교가 개통된지 30년만에 창선,삼천포대교가 개통되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관광명물로 탄생한 창선,삼천포대교는 삼천포와 창선도 사이 3개의 섬을 연결하는 5개의 교량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해상국도(3번국도)로 남아 있는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관광명소이다.

남해의 새로운 관문으로 탄생한 이 다리는

창선도의 육상교량으로 150m 길이의 PC빔교인 단항교,

창선과 사천 늑도를 연결하는 340m의 하로식아치교인 창선대교,

사천시의 늑도와 초량을 잇는 340m 길이의 PC BOX인 늑도대교,

초양섬과 모개섬을 잇는 202m의 종로식 아치교인 초양대교,

모개섬과 사천시를 연결하는 436m의 콘크리트사장교인 삼천포대교 등 다섯개의 교량이 다리 박물관을 방물케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1995년 2월 착공하여 2003년 4월 개통한 창성~삼천포대교는 총공사비 1,830여억원으로 한국 최초로 섬과 섬을 연결하는 교량으로 교량 자체가 국제적인 관광지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남해군 또한 주변 개발을 통해 명실상부한 한려수도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 보물섬 남해를 찾아서... Ⅰ편 : (남해 제6경)인간의 삶과 자연의 조화! 가천마을 다랑이 논

- 보물섬 남해를 찾아서... Ⅱ편 : (남해 제1경)삼남 제일의 명산! 금산(錦山)과 3대 기도도량의 하나! 보리암

- 보물섬 남해를 찾아서... Ⅲ편 : (남해 제2경)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남해대교와 이순신 장군의 첫 무덤! 충렬사

- 보물섬 남해를 찾아서... Ⅳ편 : (남해 제5경)노량해전의 승장. 이순신 장군의 유해 도착지!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

- 보물섬 남해를 찾아서... Ⅴ편 : (남해 제3경)한 폭의 수채화같은 남해안 최대의 해수욕장! 남해 상주 은모래Beach

- 보물섬 남해를 찾아서... Ⅵ편 : (남해 제4경)원시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어업! 원시어업 죽방렴

- 보물섬 남해를 찾아서... Ⅶ편 : 이국적인 풍경! 독일마을

 

【 일 정 표 】2014년 4월 12일(토)-13일(일) 1박2일

             ◈ 첫째날(4/12) 오후 : (하동)십리벚꽃길-화개장터-최참판댁/평사리들판-(남해)남해대교&충렬사-관음포 이충무공유적-가천암수바위와 남면해안, 다랭이논

             ◈ 둘째날(4/13) : 금산&보리암-상주 은모래Beach-죽방렴

 

제Ⅱ편 : (남해 제1경) 금산과 보리암

삼남 제일의 명산! 금산

우리나라 3대 기도도량의 하나! 보리암

 

남해 제1경, 금산과 보리암 탐방은 복곡제1주차장에 전세버스를 주차하고, 마을버스를 이용(요금:편도\1,000) 매표소와 한려해상국립공원 복곡탐방지원센터가 있는 복곡제2주차장까지 이동하여 도보로 금산과 보리암 탐방을 하게 된다.

금산 정상을 오르는 탐방코스 중 가장 쉽고, 빠르게 오를 수 있는 코스로 금산 정상 등산과 보리암 탐방까지 마치고 복곡제2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는데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 탐방코스 : 약 2.26km/약 55분 소요

복곡제2주차장-(0.8km/20분)→금산등산로&보리암 입구-(0.1km/3분)→금산 정상입구 삼거리-(0.13km/3분)→금산 정상(705m)-(0.23km/6분)→보리암입구-(0.1km/3분)→보리암-(0.9km/20분)→복곡제2주차장

※실제 탐방시간은 복곡제2주차장을 출발하여 탐방을 마치고 되돌아 오는데 약 45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 보리암매점의 등산로입구(사진 左)와 금산입구 삼거리로 오르는 탐방로(사진 右) 

                  ▲ 금산 입구 삼거리

 

상기의 탐방코스로 탐방을 하게 되어 쉽고 빠르게 금산 정상에 올라, 남해 제1경인 주변의 기암괴석과 솟아오른 암봉들, 그리고 한려수도에 점점히 떠있는 다도해의 남해 바다와 주변의 광활한 풍경을 기대했지만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와 짙게 드리운 운무가 정상 주변을 덮고 있어 전혀 감상치 못하고 실망만 안고 내려와야만 했다.

그러나 금산 정상에 올라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것으로 위안을 삼은 탐방이 되었다.

 

 

 

                  ▲ 금산 입구 삼거리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탐방로

 

♧♧ 남해 금산(南海 錦山, 705m)

남해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금산은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올려 조선 건국의 성업을 이룬 곳으로, 전국 3대 기도처(강화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의 하나인 보리암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이다. 기암괴석의 절경과 남해를 한눈에 굽어보고 있어 장쾌하다. 한겨울에도 포근하여 겨울 등산 코스로도 좋다.

 

 

                  ▲ 금산 정상 주변을 덮고 있는 운무속의 기암괴석들

 

금산은 삼남 제일의 명산으로 온갖 전설을 지닌 38경의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빼어 닮았다하여 소금강 또는 남해금강이라 불린다. 주봉인 망대(701m)를 중심으로 왼편에 문장봉, 대장봉, 형사암, 오른쪽에 삼불암, 천구암 등 암봉이 솟아 있다. 탑대(고제암)를 중심으로 가사굴 쌍호문 등 명소가 많다.

금산의 절경 38경 중에서 쌍흥문, 사선대, 상사암, 암불암 등이 대표적인 명소이다.

쌍흥문은 여인의 눈동자 같기도 하고 커다란 해골에 두 눈이 뻥 뚫린 듯하기도 한 쌍굴로서 높이는 약 7~8m 정도이다. 굴이 둥근 모양이어서 '한 쌍의 무지개'라는 이름을 얻었다.

굴속에 들어 뒤돌아 보면 다도해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멀리 상주해수욕장의 쪽빛 바닷물이 반짝이고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다.

굴 속에서 내려다 보는 산과 바다의 조화도 절경이다.

금산에서 가장 웅장한 높이 80m의 상사암은 앵강만과 미조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상사암에는 양반집 규수를 짝사랑하던 머슴의 전설과 여수 돌산에 사는 한 총각이 남해에 고기잡으러 왔다가 우연히 만난 과수댁을 사모한 끝에 상사병에 걸려 죽을 처지에 있었는데, 이를 안 과수댁은 상사병을 고칠 수 있다는 이 바위에서 총각과 운우의 정을 나눈 뒤 백년해로 했다는 전설이 얽혀 있는데 이 같은 전설은 호남지방과 생활권을 같이 했던 남해의 옛 생활상을 엿 볼 수 있고, 이 바위에 올라 기원하면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신라 신문왕3년(683) 원효대사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고하여 원래 이름은 보광사였고, 산 이름도 보광산이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약 200m 떨어진 큰 바위 아래에서 기도를 올리고 세상을 얻었다고 한다.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나 그 만큼 큰 비단을 구할 수가 없자 비단이란 이름으로 산을 덮어 주었다.

이후 현종은 보광사를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자 보리암으로 개칭했다.

 

 

                  ▲ 금산 정상의 바위들

 

삼남 제일의 명산이라 일컫는 금산은 보리암에서 바라보는 남해바다에 펼쳐지는 일출명소의 하나이기도 하다. 남녁에 위치하여 봄맞이 산행지로 3월에 가장 많이 찾는다. 인근에 상주해수욕장이 있어 여름 바캉스를 겸한 바다산행으로도 인기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경관이 수려하고, 바다와 섬, 일출을 조망할 수 있으며, 경상남도 기념물로 1974년 지정된 점 등을 고려하여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맞아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에 선정되었다.

 

◈ 남해 금산 봉수대(南海 錦山 烽燧臺)

*경상남도 기념물 제87호

*소재지: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는 전통시대의 통신수단이다.

이 제도는 처음네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 12,3세기경인 고려 중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둔 산꼭대기 중에서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평시에는 불꽃이나 연기를 한 번 올리지만,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두 번, 적이 해안에 접근하면 세 번, 바다에서 접전이 일어나면 네 번, 육지에 상륙했을 때는 다섯 번의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곳 금산의 봉수대는 고려 의종(재위1147~1170) 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이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 가운데서 동래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제2봉수로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이다. 이곳에서 점화된 봉수는 창선 대방산을 통해 사천, 진주 등을 거쳐 서울에 전달되었다.

 

◈ 금산38경

- 1. 망대 :

 

금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이곳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 금산과 남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와 그 광활한 경치가 황홀하다. 장엄한 남해의 일출을 보로 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이곳에 오르면 일망지하에 금산 삼십팔경과 금산을 에워싼 만경창파를 한 눈으로 굽어 볼 수 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던 봉수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사방조망이 비길 때 없이 넓고 아름답다.

- 2. 문장암 : 망대를 오르는 계단과 마주 하고 있는 정상을 지키는 바위다. 명필바위라고도 한다.

문장암은 남해 금산의 정상에 있다. 조선 중종 때 대사성을 지낸 한림학사 주세중 선생이 전국을 다니며 풍류를 즐기다가 남해에 있는 금산이 명산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금산의 쌍흥문을 통하여 이곳 정상까지 올라와 보니 과연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신비로운 전설이 가득함으로 감탄하여 자연암에다 '유홍문 상금산(由虹門 上錦山)'이라는 글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 3. 대장봉 : 금산 보리암 바로 뒤에 우뚝 솟은 큰 바위로서 웅장하고도 위엄있게 창공을 찌르고 서 있는 모습이 대장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대장봉 왼쪽에는 용호농주형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있으면 반드시 대장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 4. 형리암 : 금산 보리암 바로 뒤에 잇으며 대장봉을 향해 마치 허리 굽혀 절하는 모양으로 생겨 형리바위라고 한다. 보리암에서 처음 보는 사람은 바위가 곧 떨어질 위험을 느낄 정도로 허리 굽힌 모습으로 보인다.

 

   

 

- 5. 탑대 : 천인단애 위에 보리암전 삼층석탑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탑이 서 있어 이 절벽을 탑대라 한다. 보리암 바로 밑에 있으며 전망이 좋아 봄철의 푸른 나뭇잎과 가을 단풍 경치는 천하절경이라 할 만하다. 가장 탐방객들이 많이 모여드는 자리다. 보리암전 삼층석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74호로 지정되어 있다.

- 6. 천구암 : 탑대 바로 북쪽에 있는 바위다. 바위 모양이 비들기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 7. 이태조기단 : 이성계가 백일기도 후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깃든 유적으로 탑대에서 바로 건너다 보이는 삼불암 아래에 있다.

천하를 잡으려는 이성계는 전국 명산을 찾아 기도를 드렸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금산에서의 백일기도로 등극하게 되자 비단으로 두른다는 뜻으로 보광산을 금산으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8. 가사굴 : 탑대 동쪽에 있는 바위굴. 옛날 낙서대사 때 천동천녀가 가사를 입고 내려와 목욕을 하고 물을 길어 갔다는 전설이 남아 있어 가사굴이라고 한다. 길이 약간 험하기 때문에 대개 못보고 가는 사람이 많다. 이 가사굴에는 많은 샘물이 흘러 내리고 있어서 수양이나 기도를 하는 분들이 토굴을 짓고 몇 달씩 지내는 일도 있다. 가사굴은 백명굴, 삼사기단과 함께 금산 39경 중 가장 조용한 선경으로 이름이 높다.

 

                   

 

- 9. 삼불암 : 조선태조기단 왼쪽 깎아지른 높은 곳에 바위 세 개가 있는데 한 개는 누워 있고 두 개는 서 있는데, 세 개의 바위가 부처님의 좌상같다고 해서 삼불암이라고 한다.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하기 전에는 이 바위들이 모두 누워 있었는데 기도가 끝나자 두 개의 바위가 모두 일어나 앉았다. 만약 세 개 모두가 일어났더라면 이성계는 중국 땅까지 다스리는 천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10. 천계암 : 조선태조기단 뒷편에 있으며 이성계가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뜻밖에 맑고 고운 닭 울음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그 자리에 닭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11. 천마암 : 망대 아래 동쪽에 있는 두꺼비 모양의 바위. 이성계가 기도하고 있을 무렵에는 회두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12. 만장대 : 탑대 서남쪽 깎아 세운 듯 천인 단애를 이루고 있는 절벽. 높이가 만장이나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쌍홍문의 오른쪽에 있다.

-13. 음성굴 : 만장대 바로 북쪽 높이 2m, 길이 5m 정도 되는 조그만한 바위굴. 굴속에 들어가 굴 바닥을 두드리면 장구 소리와 같은 들린다고 해서 음성굴이라 한다.

-14. 용굴 : 음성굴 오른쪽 50m의 길고 넓은 굴이 있는데 옛날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숨어 있는 굴이다.

-15. 쌍홍문 : 상주쪽에서 금산 상봉에 이르는 암벽에 두 개의 둥글고 큰 구멍이 문 모양으로 나란히 있는 돌문이다. 보기에 따라 여인의 눈동자 같기도 하고 커다란 해골에 두 눈이 뻥 뚫린 듯하기도 한 쌍굴로 높이는 약 7~8m이다.

이 속에 들어가 보면 속이 비어 있고, 천장 벽에도 구멍이 뚫어져 있어 파란 하늘이 잡힐 듯이 보인다. 옛날 세존이 돌배를 만들어 타고 쌍흥문으로 나가면서 앞바다에 있는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나갔기 때문에 세존도에 해상동굴이 생겼다고 전해온다. 굴속에서 뒤돌아보면 다도해의 풍광은 물론 멀리 상주해수욕장의 쪽빛 바닷물이 반짝이고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다.

-16. 사선대 : 쌍흥문 바로 아래 오른쪽에 서 있는 네 사람 모습으로 생긴 바위로 옛날 삼신산의 네 선녀가 놀다가 갔다는 전설에 따라 사선대라고 한다.

-17. 백명굴 : 사선대 북쪽에는 입구는 그다지 넓지 않으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져 100명은 넉넉히 앉을 수 있는 굴이 있다. 정유재란 때 100명 내외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피난한 곳이라 백명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안에 방을 놓았던 아궁이 흔적이 남아있고 굴을 드나드는 문은 적으나 들어가면 놀랄만큼 넓은 굴이다. 이 굴은 찾기가 어려워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지 오래 되었다.

 

      

 

-18. 천구봉 : 일월봉 아래 쪽에 있는 바위로 마치 개의 형상을 하고 있어 천구봉이라 하며 일월봉을 마주 보고 있다.

-19. 제석봉 : 천구암 왼쪽에 있는 바위로 무당의 신인 제석님이 내려와서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바위로 금산의 절경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20. 좌선대 : 원효대사 등 고승들이 수도좌선했다는 장소. 실제로 바위 윗부분은 가부좌한 자세로 앉은 사람이 쑥 들어 갈 만큼 파여 있다.

-21. 삼사기단 : 좌선대 아래 위치해 있으며, 세분의 유명한 큰 스님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가 기단을 쌓고 기도를 올렸다고 해서 삼사기단이다. 삼사가 앉았던 자리가 바위 위에 뚜렷이 남아 있다.

-22. 저두암 : 금산 산장 바로 뒤에 있는 바위로서 어미돼지가 새끼돼지를 업고 있는 모양의 바위. 바로 오른쪽에 코끼리바위가 있다.

-23, 상사바위 : 주인 딸을 사랑하다 죽은 슬픈 사랑 이야기, 과수댁이 총각의 상사를 풀어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들려오는 곳으로 바위 위에서 보는 남해 다도해의 풍광이 천하절경인 곳이다.

-24. 향로봉 : 삼사기단 왼편에 있으며 마치 향로와 같다고 해서 향로봉이라 부르며 원효, 의상, 윤필 세 대사가 촉대와 함께 향로로 썼다는 전설이 있다. 

 

-25. 사자암 : 좌선대에서 상사암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사자 모양의 큰 바위

-26. 팔선대 : 상사바위 입구 오른쪽에 있는 여덟개의 바위. 서 있는 모습이 여덟 신선들이 춤추는 모양이라고 한다.

-27. 촉대봉 : 향로봉 옆에 있는 촛대 모양의 작은 바위. 원효, 의상, 윤필 등 세 대사가 기도를 올릴 때 촛대로 사용했다는 전설이 있다.

    

 

    

 

-28. 구정암 : 상사암에 구정암이 있다. 상사암에 이어진 바위에 아홉 개의 홈이 있어 빗물이 고이면 마치 아홉 개의 섬처럼 보인다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세어보면 실제 둥글둥글한 구멍이 아홉 개도 더 되는 듯 싶다. 구정암의 물은 바로 상사풀이 할 때 썼던 물이라고 한다. 이 물로 세수를 하면 그 날 재수가 좋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숙종 때 남해로 귀양왔던 약천 남구만 선생은 이 구정암을 보고 "몇 해 동안 이 아홉 개 샘을 팠으랴"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29. 감로수 : 상사암에서 조금 남쪽에 있는데 바위 밑에서 실오라기처럼 새어 나와 고이는 물을 말한다. 조선 숙종이 병중에 이 물을 마시고 나았다고 하여 구군천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 이후 사람들은 임금을 구한 이 물을 만병통치의 감로수라 한 것이다.

-30. 농주암 : 대장봉 왼편에 있는데, 세 개의 바위가 두 바위의 한복판 위에 한 개의 구슬처럼 서 있는 것이다. 왼편에 용,

오른편에 호랑이가 있어 용호가 농주하는 모양이어서 용호농주형이라고 한다.

 

 

-31. 화엄봉 : 대장봉과 농주암의 왼쪽에 있는데 바위 모양이 '華嚴' 두 글자 모양이라고 해서 화엄봉이라 하고, 원효대사가 이 바위에서 화엄경을 읽었다고 전하나, 화엄종은 의상대사가 포교한 것으로 의상대사일 것으로 추측한다.

-32. 일월봉 : 화엄봉 왼쪽에는 세 개의 바위가 층암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채석봉 가는 길에서 가깝게 보면 맨 위의 바위가 보이지 않아 일(日)자형이고, 탑대에 올라 전체를 멀리서 보면 월(月)자형으로 보여 일월봉이라 한다.

-33. 흔들바위 : 일월봉 왼쪽 제석봉 뒤쪽 맞은 편에 있는 흔들바위로 거북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구암(龜岩)이라 하였으나, 한 사람의 힘으로도 움직인다 하여 흔들바위라고도 부른다. 바위의 무게는

35톤 가량 된다. 거북 모양의 목부분을 위로 추켜 세운 듯 밀면 가장 잘 흔들린다.

 

-34. 부소암 : 중국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갔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법왕대라고도 한다.

박진욱의 "역사 속의 유배지 답사기' 중에서 문득 엄청나게 큰 바위가 하늘로 해처럼 솟았다. 그럴 듯한 이름 하나 주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으니, 이름하여 "부소암"이다. "부소"는 중국 진시황의 태자 이름이다.

남해 외딴 섬 바위에 어이하여 진날 진시황의 큰 아들 이름 부소가 붙었을까? 누가 붙인 이름일까? 유배객이 붙인 것은 아닐까? 이 금산에 올랐던 류의양이 붙였을지도 모르고, 남구만이 붙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감신ㅂ의 참소로 억울하게 이 고독한 외딴섬에 귀양을 온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임금이 콩과 보리를 가리듯이 충신과 간신을 가리지 못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말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지나라 시황의 태자 부소이다.

진시황은 두 아들이 있었다. 똑똑하고 착한 부소와 흐리멍텅한 호해가 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소인은 자신보다 똑똑하고 착한 사람을 싫어하는 법이다.감신배 이사와 환관 조고는 장자 부소가 임금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여 진시황에게 참소를 넣었다.

"부소가 폐하를 바라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부소를 만리장성 쌓는 곳으로 보내라."

진시황은 호혜를 가까이 하고 부소를 멀리 변방으로 내쳤다. 이사와 조고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부소가 폐하를 원망합니다."라 다시 참소를 하니 진시황은 부소에게 자결을 명하는 칼을 내렸다. 부소는 그것이 간신배가 꾸민 간괴인 줄 알고 불로초를 찾아 삼신산으로 떠나는 서불의 배를 타고 도망을 쳤다. 서불이 동으로 항해하여 남해 금산에 도착하여 서불은 양아리 골짜기의 바위에 왔다는 흔적만 남기고 다시 떠났다. 그러나 부소는 배를 타지 않고 신령스런 바위 아래 움막을 짓고 살다가 주어진 수명을 누리고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부소암이라 불렀다.

역사에서 부소는 진시황이 보낸 사약을 받고 변방에서 죽고, 둘째 아들 호해가 황제를 계승하였으나 3년 만에 진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35. 상주리 석각 : 부소암으로 오르는 골짜기 큰 바위에 새겨진 고문자. "서불 과차"라고 하는 이 고문자는 진시황이 사신 서불이 선남선녀 500명을 거느리고 불로초를 찾아 이곳에 와서 새겨 놓고 간 글자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또 거란 글자라는 이도 있고, "이곳은 그 어른의 사냥터" 표시라는 설도 있으나 판독이 어려워 아직껏 베일에 싸여 있다.

-36. 세존도 : 세존이 금산 쌍흥문에서 돌배를 타고 이 섬 한 가운데를 뚫고 지나 갔다는 전설이 있다. 상주 은모래Beach에서 40km 떨어져 있지만, 날씨가 좋으면 아득히 세존도를 볼 수 있다.

이 섬에는 한 복판에 원형으로 된 해상동굴이 있다. 섬 전체가 바위이며 나무도 식수도 전혀 없는 무인도이다. 남해에서는 오래 가물고 한발이 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을 본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해오고 있다. 남해의 섬 중에서 낚시가 가장 잘 되기로 유명하여 낚시철이 되면 수많은 낚시꾼들이 모여드는 장소이다. 

-37. 노인성 : 춘분,추분절의 전후 3일, 7일 동안 남해에서 가장 잘 보이는 별이다. 이 별은 사람의 목숨을 맡고 있는 별이라고 한다. 당연히 이 별을 자주 보면 장수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어 일년 중 춘분, 추분절만 되면 금산을 찾는 이들이 많아진다.

-38. 일출경 : 금산 38경 중 가장 첫 손가락에 꼽는 것은 정상과 보리암에서 보는 일출. 상사바위에서 보는 일출도 그에 못지 않다. 수평선과 구름 사이를 뚫고 물 속에서 솟구쳐나오는 듯한 일출은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도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전국 어느 곳의 일출보다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황홀한 금산 절경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 남해 보리암

우리나라 3대 기도도량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보광사의 부속 암자였던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금산의 비경과 어우러져 있는 보리암은 거대한 바위들이 서로 엉켜있는 사이사이에 낙락장송과 산죽들이 청정하게 서 있고 산밑으로 초생달 모양의 상주해수욕장에서 시작되는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반드시 하나의 소원은 들어준다는 보리암의 효험은 전국 각지에서 사시사철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한다.

보리암에 있는 삼층석탑은 신라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으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바다를 건너 오면서 방향을 잃어버렸는지 신기하게도 이 탑 앞에서 나침판을 놓으면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이다.

보리암 삼층석탑 앞은 금산의 제1전망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암자 전체의 풍광을 조망할 수도 있고, 한려수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힐 수 있다.

석탑 옆에는 해수관세음보살상이 인자하게 미소를 품고 서 있다.

 

◈ 보리암전 삼층석탑(菩提庵前 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

*소재지: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금산 정상의 절벽에 위치하고 잇으며, 비보(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의 지역에 탑,정승 등을 세워 나쁜  기운을 억누르고, 악한 기운을 보충하는 일)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보리암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보리암전 삼층석탑으로 불리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신문왕3년(683) 원효대사가 금산에 처음으로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락국의 수로왕비인 혀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으로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허태후가 가져온 부처의 사리를 이곳에 안치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양식 또한 고려 초기의 것이기 때문에 전하는 이야기와는 사실상 거리가 멀다.

이 탑의 형식은 커다란 돌 하나로 된 단층 받침을 세우고 면석에는 모서리기둥을 새겼으며,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각 층 몸체의 사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새겼다. 지붕돌의 처마에는 4단의 받침이 있으며, 약간의 경사를 두면서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꼭대기 부분에는 구슬 모양의 보주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