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삼국유사의 고장! 경북 군위(軍威) 제Ⅱ편:인각사와 삼국유사

왕마구리 2014. 5. 21. 03:08

◀ 삼국유사의 고장! 경북 군위(軍威)를 찾아서

 

이번 군위 방문은 당일 탐방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고유의 사상인 화랑도와 함께 민족의 주체성을 일깨우고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일연스님의 삼국유사가 탄생된 곳인 국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 아래 인각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근간을 밝힌 삼국유사와 함께 일연선사의 역사적 발자취와 함께 경주 석굴암 보다 100년을 앞서는 군위삼존석굴 등 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향기가 짙게 묻어나는 고장이기 때문에 이 두 곳의 유적지 탐방. 그리고 일제시대 때 지어진 화본역과 1000년 세월에도 10리의 야트막한 돌담과 고택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정겨운 모습으로 다가서는 대율리 한밤마을(일명 돌담마을)을 탐방하게 되었다.

이 네 곳의 탐방지를 방문하며 이동 경로나 주변에 산재해 있는 명소 나 문화유산인 학소대, 지보사, 김수환추기경 생가, 덕림사, 대율리 석불입상 등도 함께 탐방을 하였다. 그러나 화본역 인근 폐교된 산성중학교를 활용하여 60~70년대의 거리와 생활광경 등을 재현하여 꾸며 놓은 '엄마,아빠 어렸을 적에'는 어린이날을 맞아 부모와 함께 찾은 많은 어린이 탐방객들로 복잡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입장료(\2,000)를 받고 있어 탐방을 포기하였다.

이번 군위 방문은 하루 동안의 탐방이었지만 나름대로 내실있는 탐방이었으며, 경북 군위편은 '삼국유사의 고장! 경북 군위를 찾아서'란 명제로 관광명소별로 나누어 총 5편으로 작성을 한다.

 

                  ▲ 인각사 앞을 흐르는 학소대가 자리한 위천

 

【 군위(軍威) 소개 】

경상북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서간 70.4km, 남북간 56.2km로 남북이 짧고 동서가 길다. 지세는 곳곳에 산악의 기복이 심하여 평탄치 못하다.

남쪽에는 팔공산이 자리하여 대구광역시와 접경하면서 산맥이 동서로 긴 성벽과 같이 뻗어 있고 그 산줄기가 동으로 뻗어 청송군 및 영천시와 군계를 지어 분수령을 형성하고 있다.

군위군 중앙을 관통하는 위천은 군위군의 극동인 고로면 학암리에서 발원하여 북단인 소보면 사리리를 지나 의성군 비암면에서 쌍계천과 합류하여 낙동강 본류로 흐르고, 위천 지류인 남천은 팔공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부계,효령 양면을 거쳐 효령면 병수리에서 위천에 합류되며, 하천유역의 양안에 농경지가 형성되어 군위,소보,효령,의흥 등의 평야지대는 관개가 용이하고 토질은 사양토로 비옥하여 농경에 적합하다.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나 평균기온이 여름에는 23.9ºC이고, 겨울에는 영하 1.2ºC정도로서 한서의 차가 심하며, 산악에는 수목이 적어서 기후의 난화조절이 잘 되지 않고 하기에는 한밭과 수해가 잦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여담국, 소등붕국 등 부족국가를 형성하였고, 삼국시대 신라초에는 노동면혁(여두멱 이라고도 함)으로 불리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6년(757) 전국에 9주를 설치할 때 군위현, 효령현, 부림현으로 하여 승선군(현 선산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 현종9년(1018)에 군위현, 효령현, 부림현(부계현으로 개명)이 상주목에 속했고, 의흥군은 안동부에 속하였다. 인종21년(1143)에 다시 군위현, 효령현, 부계현이 상주목에서 일선군으로 환속되었으며, 공양왕2년(1390) 효령현이 군위현으로 이속되었으며, 부계현은 의흥군으로 각각 통합하여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종13년(1413)에는 의흥군을 의흥현으로 격하하고, 고종32년(1896)에는 다시 군위현과 의흥현이 군으로 승격되고, 고종33년(1897) 8월 4일 훈령 제35호로 13도제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 군위군과 의흥군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부,군,면의 통폐합에 따라 의흥군을 군위군에 8개면을 관할할 때 의성군 소아면(현 인곡,양지,낙전,가암,석산,학암) 일부가 군위군 고로면에 편입되었으며, 1915년 1월 1일 의성군 소문면(현 용대)이 군위군 군위면에 편입되었다.

광복이후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의성군 금성면 광현1,2,3동이 군위면에, 선산군 산동면 도산1,2동이 소보면에 편입되어 8개면 177개동이 되었다.

1979년 5월 1일 군위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7개면이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행정개편을 거쳐 2012년 2월 28일 현재 1읍, 7면, 180리가 되었다.

  

- 삼국유사의 고장! 경북 군위 Ⅰ편 : 경주 석굴암보다 앞서 세워진 석굴사원! 제2 석굴암 군위삼존석굴

- 삼국유사의 고장! 경북 군위 Ⅱ편 : 민족역사의 1번지! 인각사(麟角寺)와 삼국유사(三國遺史)

- 삼국유사의 고장! 경북 군위 Ⅲ편 :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작고 아담한 간이역! 화본역(花本驛)

- 삼국유사의 고장! 경북 군위 Ⅳ편 : 천년을 이어온 전통과 정겨운 돌담을 간직한 곳! 대율리 한밤(돌담)마을

- 삼국유사의 고장! 경북 군위 Ⅴ편 : 기타 탐방 명소들! 지보사와 김수환추기경 생가

 

【 일 정 표 】2014년 5월 5일(월) ◈ 지보사-김수환추기경 생가-인각사와 학소대-화본역-덕림사 화본리오층석탑-대율리 한밤마을(돌담마을)

 

제Ⅰ편 : 인각사(麟角寺)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천년의 혼을 되살리는 가람! 인각사

4천년 역사의 대한민국 정통성을 세우고

민족의 자긍심을 깨우쳐 주는 주요한 문화유산! 삼국유사

 

                  ▲ 인각사 앞을 흐르는 위천의 학소대

 

【 인각사지(麟角寺址) 】

*사적 제374호(1992년05월28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삼국유사로 250)

 

                  ▲ 인각사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華山, 760ㅡ)의 북쪽 기슭 강가 퇴적지대에 자리잡은 보각국사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입적한 인각사가 있었던 절터이다.

인각사는 선덕여왕11년(642) 의상대사가 세운 절이라고 전하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발굴조사결과 대웅전터로 추정되는 기단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구가 확인되어 신라 말기에 이미 절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 인각사의 본전인 국락전의 현재(사진 上)와 과거(사진 下)

 

인각사란 이름의 유래는 전설상의 동물인 기린의 형상을 닮은 화산의 자락에 인각사가 있고, 절이 자리잡은 터가 기린의 뿔끝에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명찰로 번성하였으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 후기에 들어서 퇴락하여 거의 폐사가 되었으나 효종 때 한 차례 중수가 되고, 숙종25년(1699)에 증축되었으며, 경종1년(1721)에 크게 중수하여 대웅전, 극락전, 승방, 종루 등이 다시 갖추어졌다.

고려 충렬왕10년(1284)부터 5년간 일연이 이 절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지은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경내에는 법당과 두 채의 건물, 보물 제428호인 보각국사탑과 비가 있다. 탑비는 1289년 입적한 일연스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문으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으나, 전란과 무절제한 탁본 등으로 일부 조각만이 남아 있다.

 

 

                  ▲ 인각사의 발굴유물인 통일신라 청동유물들(사진 上)

                      석조부재들(사진 下)

 

「 인각사의 전각들 」

 

 

                  ▲ 인각사 복원된 현재의 국사전(사진 上)

                     현 건물 주변의 국사전 옛 주춧돌들(사진 下)

 

                  ▲ 인각사 극락전 우측에 자리한 명부전(사진 左)과 명부전 우측에 자리한 산령각(사진 右)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軍威 麟角寺 普覺國師塔 및碑)

*보물 제428호(1965년09월01일 지정)

고려시대 보각국사 일연(1206~1289)의 승탑과 탑비이다.

탑비가 충렬왕21년(1295)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승탑은 그의 입적 때인 1289년에서 11295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인각사 보각국사탑

 

 

                   ▲ 인각사 보각국사탑에 새겨진 탑명 '普覺國師靜照之塔'(사진 上)

                       보각국사탑 탑신에 돋을새김된 사천왕상과 보살입상(사진 下左)과 중대석의 동물상과 상대석의 연꽃무늬(사진 下右)

 

승탑은 자연석으로 된 지대석 위에 팔각의 하대석을 설치한 형태이다. 중대석에는 동물상이 조각되어 있고 상대석은 원형과 비슷한 팔각으로 주위에 작은 연꽃을 조각하였다. 탑신도 팔각인데, 정면에는 '普覺國師靜照之塔(보각국사정조지탑)'이라는 탑명을 새겼다. 뒷면에는 문모양의 조각이 있으며 남은 6면에는 사천왕입상과 연꽃 위에 서있는 보살상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의 두꺼운 추녀 밑은 위로 느리게 들려있고, 낙수면은 급한 편이며 지붕선 끝부분에 꽃장식이 달려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큼직하게 올려져 있다.

 

 

                   ▲ 인각사 보각국사탑비(사진 上)

                      보각국사탑비가 보관되어 있는 비각(사진 下)

 

탑비는 국사의 제자인 법전에 의해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으며, 글씨는 진나라까지 가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지금은 비의 형체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비문은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남아 있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시기가 충렬왕21년(1295)이므로, 부도탑의 건립 역시 일연이 입적한 해인 1289년에서 1295년 사이의 일로 짐작된다.

 

♧♧ 군위 인각사 석불좌상(軍威 麟角寺 石佛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9호(2002년08월19일 지정)

고려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불신과 배 모양의 광배가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있다. 머리에는 굵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있다.

 

 

 

                   ▲ 인각사 석불좌상(사진 上)

                      인각사 석불좌상의 측면(사진 左)과 후면(사진 右)

 

적당히 살이 오른 얼굴은 원만한 인상이며, 두툼하게 처리한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흐르고 있다. 특히 뺨을 솟아나게 처리하고 눈두덩을 볼룩하게 처리한 데 비해 코와 입을 작게 하고 귀를 길게 처리한 점 등을 볼 때 잘 묘사된 불상이다.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가 표현되었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평행된 옷주름이 촘촘하게 물 흐르듯 새겨져 있으며, U자형으로 넓게 트인 가슴에는 속옷과 띠매듭이 드러나고 있다. 무릎사이의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옷주름은 양팔뚝을 감싸고 흘러내린 대의의 주름과 겹쳐져 무릎 부근에서 크게 3단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손 모양은 오른손으로 촉지인을 취하고 있고, 왼손으로 선정인을 취하였으며, 손 위에는 조그마한 보주를 올려 놓았다.

이 불상은 주각수법으로 볼 때 10세기에서 11세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이 시기의 불상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군위 인각사 미륵당 석불좌상(軍威 麟角寺 彌勒堂 石佛坐像)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6호(2002년08월19일 지정)

 

 

 

이 불상은 눈을 반쯤 뜨고 명상에 잠긴 듯하며, 풍만한 얼굴엔 자비로움이 가득하다. 코는 파손되어 원래 상태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균형있게 처리되어 있다. 입술은 작고 도톰하게 새겨 풍만한 얼굴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고, 목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는데 3개의 주름인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어깨가 마멸되어 있긴 하지만, 세심하게 새긴 옷주름으로 보아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친 우견편단으로 옷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두 팔과 무릎이 깨어져 없어졌는데, 무릎은 불신에 비해 높은 편이나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았다. 손 모양은 왼손의 팔꿈치를 굽혀 무릎 쪽으로 내려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고, 오른손은 전체적인 조형상 촉지인을 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부피감 있는 얼굴, 평행계단식 옷주름선, 양감있는 가슴 표현 등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이 불상은 인각사의 창건 연대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불상이다.

 

♧♧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軍威 麟角寺 三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7호(2002년08월19일 지정)

 

 

                   ▲ 인각사 삼층석탑: 보수 전(사진 左)과 후(사진 右)

 

현재 지면상에 노출된 것은 기단의 상대갑석부터인데, 탑의 양식은 전형덕인 신라탑의 양식을 이어 받은 삼층석탑으로 보기 드물게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다.

지표면 위에 노출되어 있는 상대기단의 갑석은 2매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툼한 부채꼴 모양의 받침에 얕은 사각형의 받침이 겹쳐져 있는 이중의 탑신 괴임대가 있다.

옥개석은 옥신의 체감비율과 어울리게 줄어들고 있다. 옥개석의 중급받침은 전체가 4단으로 되어 있으며, 모서리의 선은 많이 둘글려져 있다. 3층의 옥개석 위에는 노반과 복발, 양화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그 위에 보륜이 앉혀져 있는데 양화와 마찬가지로 문양이 많이 마멸되어 있다. 보륜의 위에는 불꽃 모양의 장식물이 이어져 있는데, 상륜부의 다른 부재에 비해서 석질이 달라 원래 탑재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단의 우주하단에 있는 재목을 서로 이을 때 쓰는 나뭇조각 자국이나 갑석과 면석이 이완되면서 보이는 적심석을 볼 때 한 번 해체되었다가 조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인각사 삼층석탑 상륜부

 

탑의 양식은 전형적인 신라탑 양식을 이어받은 삼층석탑으로 보기 드물게 상륜부가 남아 있어 양식과 구조연구에 중요하다. 또한 이 탑의 제1탑신석이 제2탑신석보다 높이의 비례가 크고, 옥개석의 옥개받침이 4단인 점 등을 볼 때 고려전기의 양식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되어 나말선초 석탑의 편년 연구에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

「 일연 스님이 집필한 삼국유사 」

유사(遺事)란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거나 빠진 일들을 수록한 글이다.

삼국유사를 위한 선행작업으로 만들어진 역대연표는 일연스님이 인흥사에 주석하던 1278년에 간행되었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시기는 '가섭불연좌석조'에 '지금 지원18년'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고려 충렬왕7년으로 일연스님의 나이76세 되던 해이다. 일연스님이 청도 운문사에 있을 때이며 충렬왕이 경주를 직접 방문했던 때이다.

삼국유사에 편찬자로서 일연스님이 등장하는 유일한 대목은 제5권의 "國尊曺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沖照大禪師一然撰(국존조계종가지산하인각사주지원경충조대선사일연찬)"이라는 한 문장이다. 인각사 주지와 원경충조라는 칭호로 보아 이때에는 적어도 일연스님이 국사에 책봉된 충렬왕9년(1283) 이후의 시기를 포함한다고 볼 때 삼국유사 직접 찬술의 상한선은 1281년, 하한선은 입적한 해인 1289년으로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전권을 살펴볼 때 일연스님은 진전사 시절부터 자료를 수집하고 답사를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승려로서 일연스님의 전 생애가 곧 '삼국유사'의 집필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첫 머리에

"대체로 옛 성인들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가르침을 베풀려 하면 괴이,완력,패란,귀신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날 때에는 부명을 받고 도록을 받는 것이 반드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 천자의 지위를 장악하고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중략)

그러므로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럽고 기이한데서 나온 것이 어찌 기이하다 하겠는가? 이는 기이 편을 모든 편의 첫머리에 싣는 까닭이며 의도이다."

라고 기술하며 삼국유사 저술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당시 지배층이 우리나라의 시작을 기자조선에 두려하는데 반해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단군신화를 기술하여 국가의 위상을 중국과 나란히 두었다. 단군의 치세를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와 동시대로 처리하고, 단군을 천제의 아들로 설정하고 있어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중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주적 민족사관을 펼쳤다.

우리 민족이 몽고의 침입으로 굴욕을 당하고 있는 시기에 민족자주의식을 깨우치고 후대에 민족혼을 심어주기 위해 삼국유ㅏ를 편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인각사 보각국사 재현비명(普覺國師 再現碑銘)

                     [ 2006년 일연스님 탄생 800주년을 맞아 보각국사 비를 재현하여 조성한 비명이다.

                         중앙승가대학에서 펴낸 두 권의 '인각사보각국사비첩'을 참고하여 제작한 것이다.

                         '인각사보각국사비첩'의 발간과 보각국사비 재현에는 자료수집과 조사에 헌신한 서지작가 박영돈 선생의 공로가 컸다.]

 

「 삼국유사의 간행 」

일연스님 생전에 혹은 사후 고려시대 때 삼국유사가 간행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 고려 공민왕10년(1361) : 1월에 작성된 '경주사수호장행안서'에 '신라시조박혁거세왕조'의 내용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 조선 태조3년(1394) 조선 초기본 간행 :

   4월 '심국사기'를 간행한 전후에 경주부에서 상재된 것으로 추정. 구송은장본, 구니산장본, 범어사본을 합친 권제3~5권까지 3책.(국보 제306호)

- 조선 중종7년(1512) 정덕본 간행 : 경주부윤 이계복이 1512년 12월에 간행.(국보 제306-2호)

 

「 일연(一然)스님의 생애 」

고려중기인 13세기 최씨 무신정권시대, 몽고의 침략으로 도읍을 강화도로 옮겼다가 몽고에 굴복하는 등 어려운시기에 생존했던 분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에서 고려 희종2년(1206)에 아버지 김언필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 태어났는데, 어머니 이씨가 해가 삼일 동안이나 계속 집에 들어와 자신의 배를 따스하게 비쳐주는 태몽을 꾸고 스님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 인각사 국사전에 봉안된 대각국사 일연의 영정

 

속명은 건명이었고 법명은 회연이었으나, 뒤에 밝음과 어둠이 하나라는 뜻으로 일연으로 바꾸었다. 아홉살이 되던 해인 고종1년(1214)에 지금의 남해 무량사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열네 살이 되어 설악산 진전사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설악산 데청봉이 바라다 보이는 궁벽한 골짜기에 자리한 이 절은 신라의 선승 '도의'가 은거하였던 곳으로 구산산문 중 가지산원이 연원한 곳이다.

1249년 남해로 거처를 옮겨서 10년을 살았으며, 이 시기에 대장경 간행사업에 3년 정도 참여를 하였다. 1261년 강화도 선월사를 주재하기 시작하면서 설법을 하였고, 이때 보조국사 지눌의 법을 잇게 되었다.

1268년 조정에서 선종과 교종의 고승 100명을 개경에 초청하였는데, 이 때 왕은 일연스님으로 하여금 그 법회를 주관하게 하였고 그의 강론과 설법은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스님의 나이 78세 때에 충렬왕은 그를 원경충조라는 호를 내리고 국사로 삼았다. 그러나 스님은 늙으신 어마니의 병환을 핑계로 절로 돌아갔다. 그러나 스님이 내려온 다음 해 어머니는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조정에서는 인각사를 중수하고 토지를 하사하여 일연스님으로 하여금 상주하게 하였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 '효선편'을 둔 것은 어쩌면 아홉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 곁을 떠나 왔기에 19세에 일연스님을 낳고 77년을 홀로 사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 때문일 것이다.

인각사에서 구산선문의 법회를 여는 등 성황을 이루더니, 충렬왕15년(1289) 여러 승려들과 담소하다가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나이 94세요, 출가한지 71년이었다. 조정에서는 보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일연스님이 저술하거나 편찬한 서적이 많이 있으나 '삼국유사'만이 현존한다.

 

                  ▲ 인각사 부도전

 

♧♧ 삼국유사 권3~5(三國遺事 券三~五)

*국보 제306호(2003년02월03일 지정)

고려 고승 일연(1206~1289)이 충렬왕7년(1281)에 편찬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삼국유사' 권제3~5권까지의 3권을 1책으로 묶은 것인데, 푸른 비단의 표지 위에는 큰 글자로 '三國遺事'라 씌어 있고, 작은 글씨로 '乙亥 昔珠(을해 석주)'라고 적혀 있다.

본문은 책 전체를 일일이 배접하고 내용이 손상된 경우는 보사되어 있다. 앞부분 6장이 결락된 권제3은 50장, 권제4는 31장, 끝의 4장이 결락된 권5는 26장으로 모두 합하여 107장이다. 한편 고려 왕들에 대한 문장에 선왕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의 뜻으로 글자의 한 획을 생략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하는 피휘 대상자, 이를테면 '융(隆, 태조의 아버지)'을 '풍(豊)'으로 대치한 것과 '무(武, 혜종의 이름)'를 한 획 생략한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의 대상자에 피휘가 적용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간행본임을 알 수 있다.

내용면에서는 정덕본의 여러 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널리 이용하고 있는 조선 중종7년(1512) 경주에서 간행된 정덕본 보다 앞서 조선초인 14세기말에 간행된 현존본 삼국유사 중 가장 빠른 간본으로 조선초기 서지학 연구는 물론 정덕본 삼국유사의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국보 제306-2호(2003년04월14일 지정)

고려 충렬왕7년(1281)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사서로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하였다. 기이편의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가 있다.

홍법편은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내용, 탑상편은 탑과 불상에 관한 내용, 의해편은 원광서학조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한 내용, 신주편은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들에 대한 내용, 감통편은 신앙의 영이감응에 관한 내용, 피은편은 초탈고일한 인물의 행적, 효선편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등을 각각 수록하였다.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그 특징을 보면 첫째, 역사,불교,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고기,사지,비갈 등 지금은 전하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기에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둘째, 차자표기로 된 자료인 향가, 서기체의 기록, 이두로 된 비문류, 전적에 전하는 지명 및 인명의 표기 등은 한국고대어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되며 14수의 향가는 우리나라 고대 문학 연구의 값진 자료이다.

셋째, 한국고대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이다. 탑상편의 기사는 탑,불교,사원건축 등에 그리고 역사고고학의 대상이 되는 유물,유적, 특히 불교의 유물,유적을 조사,연구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문헌으로 꼽힌다.

넷째, 풍류도를 수행하던 화랑과 낭도들에 관한 자료를 상당히 전해주고 있다.

종교적이고 풍류적인 성격을 많이 내포하고 있으며, '삼국사기'화랑관계 기사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이용하고 있는 조선 중종7년(1512) 경주 간행(중종임신본) 삼국유사 중 결장이 없는 유일한 책인 동시에 같은 판본 중에서도 인출시기가 가장 빠른 본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