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강원&충청권

위대한 고구려의 혼! 충주 고구려비

왕마구리 2014. 10. 20. 23:02

◀ 한반도의 중심 고을! 충북 충주(忠州)를 찾아서

 

충주지역 탐방은 2012년 8월 1일 탄금대, 2013년 6월 15일 미륵대원지와 하늘재 트레킹으로 이미 두 차례 방문하여, 이번 탐방은 세번째이다.

지난 두 차례의 탐방은 충주 지역을 목적지하여 방문한 것이 아니라, 괴산과 단양 지역 탐방을 하면서 가는 길에 한 장소씩을 정해 탐방을 실시한 것인데 반해, 이번 탐방은 1박2일 일정으로 충주지역만을 탐방할 목적으로 실시가 된 것이다.

이번 충주 방문에서 탐방한 관광지를 아래와 같이 소개를 하기로 하며,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제317호) 탐방과 계립령로 하늘재(명승 제49호) 트레킹은 2013년도 탐방 때 소개를 하였으므로 다시 소개를 하지 않기로 한다.

 

【 충주(忠州) 소개 】

중원문화권의 중심지인 충주는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며 984.02㎢의 면적에 약 21만명의 인구를 가진 자연경관이 수려한 고장이다.

전국 제일의 수질을 자랑하는 수안부 온천과 앙성온천, 문강온천이 있으며, 자연경관이 뛰어난 충주호와 월악산국립공원, 선조들의 얼이 깃든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중원 고구려비),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 일명 중앙탑), 탐금대, 충주 미륵대원지(중원미륵리사지, 사적 제317호) 등 역사유적과 골프장, 스키장 등 관광자원이 풍부한 고장이다.

특히 충주에서 단양까지 충주호의 130리 뱃길은 주변의 풍치관광과 더불어 역사 탐방관광 코스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 중원문화의 중심! 충주 청룡사지 문화재를 찾아서...

- 충주 고구려의 혼! 충주 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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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강 비내섬 갈대밭을 찾아서...

 

【 일 정 표 】2014년 10월 9일(목)~10일(금) 1박2일

     ◈ 첫째날(10월09일) :

청룡사지(청룡사자 보각국사탑<국보 197호>, 보각국사탑 앞 석등<보물 656호>, 보각국사탑비<보물 658호>)-비내섬-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장미산성(사적 400호)-충주 고구려비(국보 205호)-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 중앙탑)

    ◈ 둘째날(10월10일) :

임충민공 충렬사(사적 189호)-단호사(철조여래좌상 보물 512호)-충주 미륵대원지(사적 317호)-계립령로 하늘재(명승 49호)

 

◀ 위대한 고구려의 혼! 고구려비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

 

                  ▲ 전시관에 보관중인 고구려비

 

♧♧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국보 제205호(1981년03월18일 지정)

*소재지: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280-11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으며, 뒷면의 글씨는 마모가 특히 심해 거의 알아 볼 수 없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예서체로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닿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前部大使者(전부대사자)', 諸位(제위)', '使者(사자)'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高牟婁城(고모루성)' 등의 글자가 보이고, 募人三百(모인삼백)', '新羅土內(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싸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 고구려비의 앞면

 

▣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비석 충주 고구려비의 의의

첫째.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석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광개토대왕비와 함께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열쇠로 만주로부터 남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고구려의 존재를 뚜렷이 보여준다.

둘째.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를 동이(東夷)라 하고 신라의 왕을 매금(寐錦)이라 부른 점은 고구려가 상위의 입장에서 신라를 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형여제(如兄如弟)라는 표현이나 고구려 왕이 신라 매금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내용도 고구려와 신라가 주종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신라 내에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시실을 증명하고 있다.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는 신라에 파견된 고구려의 군사령관이었을것이다.

 

 

 

 

                  ▲ 고구려비의 사면

 

세째. 3국간의 정치적 관계 뿐만 아니라 문화적 교류와 영향을 알 수 있다.

        당주, 도사 같은 직명은 고구려 문화가 신라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불교 등 고구려 문화가 백제와 신라에 전해졌듯 비석 문화도 백제와 신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네째. 고구려의 관등조직이나 인명표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내당주, 고무루성수사 등 관직명과 전부, 하부 등 출신부명, 그리고 태사자, 주부, 발위사자, 대형 등 관직명, 다우환노, 귀덕, 보노 등 고구려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의 인명 표기가 관직명, 출신부명, 관등명, 인명 순으로 기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고구려에서도 이두식 표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절사, 절교사 등의 용어는 이두로서 신라의 이두가 기원을 두고 있다는 추정을 뒤받침한다. 충주 고구려비의 이두식 표기는 순한문식으로 된 광개토대왕비와 대조를 이룬다.

고구려의 이두식 표기는 평양성 각석에서도 확인된다.

 

 

                  ▲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충주 고구려비는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 주소:충주시 감노로 2319(중앙탑면)

=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 휴관일: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추석날

= 입장료:무료

 

                  ▲ 고구려비 전시관 내부 통로

 

▣ 충주의 고구려 유물등

=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제1401호)

= 건흥오년명 금동불광배

   충주시 노은면에서 발견된 높이 12.4cm의 주형광배이다. 광배 뒷면에 5행 30자로 된 명문이 있는데, 아엄이라는 여성이 내세에도 불교에 귀의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석가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건흥이라는 연호는 현재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되고 있어 고구려 불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제작연대는 536년 또는 596년으로 여겨진다.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충주 장미산성(사적 제400호)

= 충주 두정리 고구려고분

2007년 발굴조사에서 굴식돌방무덤 6기가 확인되었다. 두정리 유적은 고구려 계통의 출토 유물과 함께 평탄지에 무덤을 조성하는 고구려 고분의 입지강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군집을 이루는 고구려 돌방무덤이 남한에서 확인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 충주 탑평리 온돌유구

충주시 탑평리 유적에서 확인된 구들시설 주변에서 항아히, 동이, 뚜껑 등 생활용구가 출토되었다. 도자기를 만든 흙에 진흙이 많이 섞여 있어 5세기 중반의 고구려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유구는 고구려가 남한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거점이던 국원성에 거주하던 고구려인에 의하여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