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강원&충청권

명장 임경업의 얼을 기린 곳! 임충민공 충렬사

왕마구리 2014. 11. 19. 12:10

◀ 한반도의 중심 고을! 충북 충주(忠州)를 찾아서

 

충주지역 탐방은 2012년 8월 1일 탄금대, 2013년 6월 15일 미륵대원지와 하늘재 트레킹으로 이미 두 차례 방문하여, 이번 탐방은 세번째이다.

지난 두 차례의 탐방은 충주 지역을 목적지하여 방문한 것이 아니라, 괴산과 단양 지역 탐방을 하면서 가는 길에 한 장소씩을 정해 탐방을 실시한 것인데 반해, 이번 탐방은 1박2일 일정으로 충주지역만을 탐방할 목적으로 실시가 된 것이다.

이번 충주 방문에서 탐방한 관광지를 아래와 같이 소개를 하기로 하며,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제317호) 탐방과 계립령로 하늘재(명승 제49호) 트레킹은 2013년도 탐방 때 소개를 하였으므로 다시 소개를 하지 않기로 한다.

 

【 충주(忠州) 소개 】

중원문화권의 중심지인 충주는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며 984.02㎢의 면적에 약 21만명의 인구를 가진 자연경관이 수려한 고장이다.

전국 제일의 수질을 자랑하는 수안부 온천과 앙성온천, 문강온천이 있으며, 자연경관이 뛰어난 충주호와 월악산국립공원, 선조들의 얼이 깃든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중원 고구려비),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 일명 중앙탑), 탐금대, 충주 미륵대원지(중원미륵리사지, 사적 제317호) 등 역사유적과 골프장, 스키장 등 관광자원이 풍부한 고장이다.

특히 충주에서 단양까지 충주호의 130리 뱃길은 주변의 풍치관광과 더불어 역사 탐방관광 코스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전체 전경

 

- 중원문화의 중심! 충주 청룡사지 문화재를 찾아서...

- 충주 고구려의 혼! 충주 고구려비

- 현존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큰 규모의 탑!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중앙탑)

- 명장 임경업의 얼을 기린 곳! 임충민공 충렬사

- 삼국시대의 석성! 장미산성

- 고구려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 조선시대 '약사'로 중건된 단호사의 문화재들

- 남한강 비내섬 갈대밭을 찾아서...

【 일 정 표 】2014년 10월 9일(목)~10일(금) 1박2일

     ◈ 첫째날(10월09일) :

청룡사지(청룡사자 보각국사탑<국보 197호>, 보각국사탑 앞 석등<보물 656호>, 보각국사탑비<보물 658호>)-비내섬-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장미산성(사적 400호)-충주 고구려비(국보 205호)-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 중앙탑)

    ◈ 둘째날(10월10일) :

임충민공 충렬사(사적 189호)-단호사(철조여래좌상 보물 512호)-충주 미륵대원지(사적 317호)-계립령로 하늘재(명승 49호)

 

◀ 명장 임경업의 얼을 기린 곳! 임충민공 충렬사 

 

                  ▲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안내도

 

 

                  ▲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정문(사진 上左)과 기념비(사진 上右)

                      외삼문(사진 下左)과 강당(下右)

 

♧♧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忠州 林忠愍公 忠烈祀)

*사적 제189호(1969년11월21일 지정)

*소재지:충청북도 충주시 단월동(충렬1길 6)

 

 

충민공 임경업(1594~1646)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숙종23년(1679)에 사당을 세웠고, 1706년에 장군에게 충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영조3년(1727)에는 사당 이름을 충렬사라 했다.

임경업 장군은 선조27년(1594) 충주에서 태어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다시 쌓아 국방을 강화하는 등 나라에 이바지한 바가 컸다. 명나라를 숭상하던 장군은 인조30년(1642)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위협을 받게되자 명군과 협력하여 청에 대항하고자 했으나 계획이 탄로나 청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청나라는 장군에게 여러 제의를 하면서 포섭하려 했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후 1646년 국내의 '심기원 모반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피살되었다. 현재 충렬사에는 장군이 사용하던 유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가당 앞 왼쪽에는 장군 부인의 곧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부인완산이씨 정렬비'가 있다.

 

 

                  ▲ 정부인완산이씨정렬비각(사진 左)과 비문(사진 右)

 

"임경업의 충절을 위해 죽음을 택한 완산이씨"

친명반청의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임경업 장군은 청의 요청으로 명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으나 명과 내통하여 명을 도와 전투에 임하게 된다. 나중에 청이 이를 알고 임경업을 압송하였으나, 도중에 놓치고 장군의 부인을 잡아 심양감옥에 가두게 되었다.

갖은 고문과 모욕을 받게 되자 "우리 주인은 병자년의 원수를 갚고,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천하 충신이다. 내 어찌 충신의 아내로서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이겠는가"라는 말을 하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충신의 아내 완산이씨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조23년(1747) 열녀비를 세웠는데 전면에 '대명충신조선임장군경업처정부인완산이씨정렬비'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 임경업 초상(林慶業 肖像)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69호

*제작시기:인조18년(1640)

*규격:가로 122cm x 세로 171cm

 

 

인조18년(1640) 장군이 청나라 지원병으로 주사상장이 되어 명나라 공격에 나섰으나, 반청친명의 확고한 신념으로 활촉과 철환을 빼고 공격하여 명나라를 은밀히 도와주었으므로, 명의 장수가 화사를 보내 2폭을 그렸는데 1폭은 명 황제에게 전달하고, 1폭은 장군에게 보내 준 것이 전해지고 있다.

 

                  ▲ 충주 충렬사비와 정부인완산이씨정렬비

 

♧ 충주 충렬사비(忠州 忠烈祠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2호

 

 

충민공 임경업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정조15년(1791)에 왕명으로 세워진 비로 비신의 크기는 높이 183cm, 너비 71cm, 두께 42c로 화강암이며 앞,뒷면에 각자하였다.

임장군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던 중 죽게 되었고 그 후 신원이 복구되자 그의 충절과 업적을 기리고자 사당을 세웠다.

정조가 친히 글을 지어 새긴 비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8.15광복절, 해공 신익희선생 서거, 6.25사변 등) 비석의 글씨에서 땀이 흘러나와 명주로 닦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충렬사 유물전시관에 소장된 유물들』

 

                  ▲ 유물전시관

 

♧ 추련도(秋蓮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0호

임경업 장군이 패용하던 칼로 역사적,기술사적 가치가 큰 유물이다.

이 칼의 칼날은 철, 손잡이와 칼집은 목재이고 목재를 고정시키는 장식은 황동과 동으로 되어 있다. 코등이는 얇은 철판으로 제작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주석, 납으로 합금하여 도금한 것이 특징이다.

칼 배의 양면에는 한시가 음각 점선조로 28자가 새겨져 있다.

 

"時呼時來否再來 一生一死都在筵 平生丈夫報國心 三尺秋蓮磨十年(시호시래부재래 일생일사도재연 평생장부보국심 삼척추련마십년)"

 

~때여, 때는 다시 오지 않나니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 것은 바로 여기 있도다 장부 한평생 나라에 바친 마음 석자 추련도를 십년이나 갈고 갈았도다

 

 

♧ 충렬사 현판(忠烈祠 懸板)

충렬사의 현판은 숭정기원후 영조3년(1727)에 사액 받은 것인데 하단의 패인 부분은 영조의 낙관이 있었던 자리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낙관을 삭제, 손상시킨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