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강원&충청권

(강원 홍천)강원도내에서 한 곳에 문화재가 가장 많은 유적지! 물걸리사지의 문화재들

왕마구리 2015. 6. 24. 20:10

◀ 물걸리사지의 문화재들

강원도내에서 한 곳에 국가지정문화재가 가장 많은 유적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석조대좌(보물 제543호), 석조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그리고 삼층석탑(보물 제545호)

 

「 강원 홍천(全北 全州) 소개 」

건강과 휴양, 레포츠의 도시 홍천!

홍천군의 면적은 1,819.60㎢로 백두대간의 크고 작은 지맥에 둘러싸인 중산간 지역이며, 홍천읍 시가지를 관통하는 북한강 지류인 홍천강이 백두대간의 분수령으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서 북한강과 합류하고 있어 그 유역에 작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경도상으로는 동경 127º 32'에서 128º 51'간에 걸쳐 있으며, 동북쪽으로 인제군과 양양군, 남쪽으로 횡성군과 평창군, 거쪽으로는 경기도 양평군과 북쪽으로 춘천시와 접하고 있는 동서간 거리는 93.1km, 남북간 거리는 39.4km이다.

 

《 홍천 9경 》

- 제1경 팔봉산 ~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 해발 327.4m의 나지막한 산으로 여덟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 봉우리마다의 비경과 기암괴석이 산허리를 끼고 흐르는 맑고 깨끗한 홍천강이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같은 절경을 연출한다.

- 제2경 가리산 ~ 발아래 펼쳐지는 소양호의 풍경과 3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진 정상은 석간수가 샘 솟으며, 강원 제1의 전망대라고 할 만큼 풍경이 좋은 산이다.

- 제3경 미약골 ~ 원시림의 자연생태계의 보고로써 촛대바위와 암석폭포 등 바위들이 각기 아름다운 형상을 이루고 있어 미암동 또는 미약골이라 불리며, 맑고 깨끗한 용천수가 샘솟아 400리를 흘러 북한강 청평댐으로 유입되는 홍천강의 발원지이다.

- 제4경 금학산 ~정상에 오르면 태극문양의 노일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명산으로, 백두대간에서 오대산을 거쳐 영서내륙 한강변까지 깊숙히 뻗어내린 한강기맥의 끝자락 장락산맥이 한 눈에 들어온다. 400리 홍천강변 최고의 절경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유명하다.

- 제5경 가령폭포 ~ 오지의 백암산(1,099m) 서남쪽 기슭에 숨어 있으며, 개령호인들이 찾으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백암산과 더불어 우렁찬 굉음을 토하며 50여m의 낭떠러지를 뒤흔들며 내리꽂는 자태가 웅장하다.

- 제6경 공작산수타사 ~ 한국의 100대 명산 공작산 끝자락에 자리한 천년고찰. 신라 성덕왕7년(708)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영서내륙 최고의 고찰이다.

- 제7경 용소계곡 ~ 우거진 숲과 곳곳에 펼쳐지는 소와 너래바위들,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10km의 계곡으로 조화롭게 펼쳐져 비경을 자랑하는 곳으로 내설악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계곡이다.

- 제8경 살둔계곡 ~ 계방천과 자운천이 어우러져 만든 살둔계곡의 물은 천연기념물인 어름치와 열목어가 서식하는 1급수를 자랑하고 있다. 봄에는 기암괴석과 철쭉이 조화를 이루어 경관이 수려하며, 가족단위의 휴식처로 적당하다.

- 제9경 가칠봉삼봉약수 ~ 조선시대 실론약수라 불렀으며, 주위에 가칠봉, 사삼봉, 응복산의 세 봉우리 가운데 위치한다하여 삼봉약수라 불린다. 수질이 우수하여 한국 명수 100선에 선정되었으며, 15가지 약수 성분이 함유된 명천으로서 빈혈, 당뇨병, 신경통, 위장병에 특히 효험이 있다고 하여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 물걸사지의 석불과 석조대좌들

                         左로부터 석조대좌 및 광배, 석조여래좌상,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석조대좌

 

《 홍천의 역사 》

고구려시대에 벌력천현으로 칭하여 오다가 신라 경덕왕 떄 녹효로 고쳐 삭주(현재의 춘천)의 영현이 되었으며 그후 고려 제8대 현종9년(1018)에 홍천으로 고치고 제17대 인종21년(1043)에 감무를 두고 별호를 화산현이라 하였다.

조선 태종13년(1413)에- 홍천현이 되어 현감을 두었다가 고종32년(1895) 5월 26일 칙령 제98호로 춘천부 홍천현이 되었다.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에 의한 13도제 실시로 강원도 홍천군이 되어 화촌,두촌,내촌,서석,영귀미,감물악,금물산,현내,북방의 9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그후 현내면을 군내면으로 변경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화촌면의 태학,결운 2개리와 금물산면 하오안,장전평 2개리를 군내면으로 편입하였으며, 1917년 금물산면을 남면, 군내면을 홍천면, 영귀미면을 동면, 감물악면을 서면으로 변경하였다.

1935년 5월 1일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분지리를 홍천군 서면 굴업리에 편입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국토가 분단되면서 38선 이남에 해당되는 인제군 기린면의 진동리와 북리의 일부, 인제면의 원대리, 남면의 부평,어론,김부,신월,정자,갑둔,신충 7개리를 편입하여 신남면을 신설하고 인제군 내면을 편입하여 11개 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됨.

1954년 10월 21일 법률 제350호 '수복지구 임시조치법' 시행에 따라 신남면은 인제군에 환원시키고, 내면은 그대로 남아 10개면으로 개편.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7호로 홍천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남면의 삼마치리가 홍천읍으로 편입. 1읍 9개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됨.

1995년 7월 26일 북방면 성동리 일부가 화촌면 구성포리로 편입되어, 현재 홍천읍, 화촌면, 두촌면, 내촌면, 서석면,동면, 남면, 서면, 북방면, 내면의 1읍 9면으로 현재에 이루고 있음.

 

【 일 정 표 】2015년 6월 11일(목)-12일(금) 1박2일

                             ◈ 첫째날(6/11) 홍천 탐방 : 수타사-공작산 수타사 산소길 트레킹

                             ◈ 둘째날(6/12) 홍천 & 양구 탐방 : (홍천)희망리 삼층석탑&사사자 삼층석탑, 홍천읍사무소-희망리 당간지주-물걸리사지(석조여래좌상,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석조대좌, 석조대좌 및 광배, 삼층석탑)-(양구)국토정중앙탑 탐방

 

이번에 탐방하는 강원도 홍천군에는 영서내륙의 최고 고찰인 수타사와 강원도내에서 한 곳에 국가지정문화재(보물 5점)가 가장 많은 유적지인 홍천 물걸리사지(강원도 기념물 제47호)가 있고, 수타사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인 공작산 수타사 산소길이 있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지역이다.

또한 홍천읍내에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3점이 있는데, 2점이 읍내 옛 홍천군청 앞 마당에, 그리고 가까운 곳에 보물 1점이 자리를 하고 있어 쉽게 탐방을 할 수 있다.

홍천군 관광을 위해 3곳(홍천읍, 수타사, 물걸리사지)만 탐방하면 되기 때문에 여유있게 관광을 즐길 수가 있었다.

홍천읍에서는 홍천 희망리 삼층석탑(보물 제79호),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보물 제540호), 희망리 당간지주(보물 제80호) 등 보물 3점을, 수타사에서는 수타사 동종(보물 제11-3호), 월인석보 권17~18(보물 제745-5호) 등 국가지정문화재 2점, 수타사 대적광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호), 수타사 소조사천왕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영상회상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지장시왕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3호), 삼층석탑(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호), 홍우당부도(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호) 등 강원도 지정문화재들을 감상하고, 수타사 주변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생태숲 산책로인 수타사를 출발과 도착지로 약 3km의 '공작산 수타사 산소길'을 탐방할 수가 있다.

또한 물걸리사지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석조대좌(보물 제543호), 석조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그리고 삼층석탑(보물 제545호)가 한 곳에 밀집되어 있다.

 

홍천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은 공작산 수타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 공작산 수타사 산소길은 도보여행 '강원&충청권' 그리고 홍천읍의 문화재들!'과 '물걸리사지의 문화재들!'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강원&충청권'에 각각 나누어 총 4편으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영서 내륙의 최고 고찰, 홍천 제6경! 공작산 수타사(壽陀寺)

수타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생태숲 산책로! 공작산 수타사 산소길

홍천읍의 문화재들! 희망리 삼층석탑, 당간지주, 괘석리 사사자삼층석탑 & 홍천군청

물걸리사지의 문화재들! 석조여래좌상,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석조대좌, 석조대좌 및 광배, 그리고 삼층석탑

 

                      ▲ 물걸리사지

 

『 홍천 물걸리사지(洪川 物傑里寺址) 』

*강원도 기념물 제47호(1982년11월03일 지정)

*면적:3,012㎡

*소재지: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588-1

 

                      ▲ 물걸리사지에서 발굴된 석물들

 

이곳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발견된 유물들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추정할 수 있으며, 홍양사가 있던 장소로 알려져 오고 있다.

출토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1점, 고려시대 철불파편 4점, 철쇄파편 2점, 암막새 4점, 수키와 조각 6점, 암키와 조각 6점, 청자 조각 4점, 토기 조각 5점, 조선시대 백자 조각 7점이 있다.

1967년 4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이 발견되었고, 이후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불대좌(佛臺座)·불대좌 및 광배(佛臺座·光背)·3층석탑(三層石塔)·석조비로자나불상(石造毘盧舍那佛像) 등이 발견되었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불대좌, 석조여래좌상,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불대좌 및 광배등은 부분적으로 멸실되고 마모되어 전체적인 모습을 완전히 알 수 없으나 그 세밀하고 정교한 솜씨는 그 시대인들의 뛰어난 예술을 짐작할 수 있으며, 특히 광배에 9구의 화불(化佛)을 마련하여 두광(頭光)과 광신(光身)을 둘러싸고 있는 솜씨는 조형예술의 단편을 볼 수 있는 걸작품이다.

 

                      ▲ 물걸사지의 석불과 석조대좌를 보관하고 있는 전각

 

1971년도 홍천물걸리사지내에 있는 유물 중 5점을 보물(寶物)로 지정하였다. 지정내용은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상(石造毘盧舍那佛像), 보물 제543호 불대좌(佛臺座),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佛臺座 및 光背), 보물 제545호 삼층석탑(三層石塔)이다.

 

【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洪川 物傑里 石造如來坐像) 】

*보물 제541호(1971년07월07일 지정)

*불상 높이 111㎝, 대좌 높이 105㎝

 

 

팔각의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석조불좌상으로 전반적으로 마멸되어 세부표현이 뚜렷하지 않으며 광배도 없어진 상태이다. 현재는 1982년에 새로 지은 전각 안에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상(보물 제542호),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보물 제543호) 등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

이 석불상 2구과 대좌는 모두 전각 주변에서 발견된 것이며 이외 금동불상 4점도 수습된 바 있다. 특히 석불 2구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에서 1942년에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화강암제 좌상으로 연화좌가 있고 높이는 1구가 5척7촌으로 완전하며 다른 1구는 3척7촌으로 목이 부러져 있으나 조각은 모두 정교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석조여래좌상의 목부분에는 얼굴과 신체를 이어붙인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

 

                      ▲ 물걸사지의 석조여래좌상

 

머리에 표현된 나발(螺髮)는 뚜렷하지 않으며 육계(肉髻) 또한 머리와의 경계선이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 코, 입의 마모가 심하여 얼굴표정을 거의 알아볼 수 없지만 온화한 인상이다. 어깨는 각이 지고 좁은 편으로 왜소하고 평판적인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이 네모난 형태에 가까운 경직된 상체의 표현은 9세기 중엽 이후 통일신라 후기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몸에는 양쪽 어깨를 덮고 있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쳤는데 가슴 위에는 수평으로 입은 내의와 띠매듭이 보이며 그 아래로 몇 개의 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내의 밑의 띠주름 표현은 855년(문성왕 17)에 조성된 경주 창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러한 형식화된 옷주름은 양쪽 팔과 결가부좌한 두 다리 위에 보이며 두 다리 사이에 모여진 삼각형태의 옷주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두고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왼쪽 다리 위에 수평으로 두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이를 땅의 신을 불러 증명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로 석가모니불이 취하는 손모양이다.

 

                      ▲ 물걸사지의 석조여래좌상의 대좌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의 3단으로 구성된 팔각의 연화대좌이다. 하대석은 팔각의 받침대와 8엽의 복련석(覆蓮石)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받침대에는 각 면에 향로와 가릉빈가(迦陵頻伽)가 새겨진 안상(眼象)이 조각되었다. 그 위에 복판중엽(複瓣重葉)의 복련을 8엽으로 돌렸으며 각 모서리마다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2단의 굄 위에 놓여 있는 중대석 역시 각 면마다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새기고 그 사이에는 8구의 신장상(神將像)을 양각하였다. 신장상은 원형의 광배를 갖추고 있지만 마멸이 심하여 형태가 뚜렷하지 않아 그 존명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상대석은 연판 안에 꽃무늬를 새긴 단판앙련(單瓣仰蓮)을 3중으로 돌렸다.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은 전반적으로 아담한 크기와 온화한 인상을 주고 있으나 둥근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의 표현, 왜소해진 신체, 형식화된 옷주름 표현, 화려하고 장식적인 대좌의 특징 등에서 9세기 중엽의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2003년 국립춘천박물관의 발굴조사에 의해 이 석조여래좌상은 석조비로자나불상의 왼쪽에 배치된 석가불상에 해당하며 오른쪽 협시인 노사나불(盧舍那佛 또는 阿彌陀佛)과 함께 삼신불(三身佛)을 이루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우리나라 삼신불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파손으로 인해 신체표현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장식성이 강조되는 9세기 중엽 이후의 전형적인 대좌 양식을 보여주고 작품이다.

 

【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洪川 物傑里 石造毘盧遮那佛坐像) 】

*보물 제542호(1971년07월07일 지정)

*불상 높이 172㎝, 대좌 높이 90㎝

 

 

전반적으로 불상의 어깨가 넓고 당당하여 육중한 느낌을 주나 불신에 비해 대좌의 높이가 낮은 편이어서 신체비례가 적당하지 않고 광배도 없어진 상태이다. 현재 1982년에 새로 지은 전각 안에 석조비로자나불상 외에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보물 제543호) 등 보물 4점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특히 석불상 2구에 대해서는 1942년에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화강암제 좌상으로 연화좌가 있고 높이는 1구가 5척7촌으로 완전하며 다른 1구는 3척7촌으로 목이 부러져 있으나 조각은 모두 정교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물걸사지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석조비로자나불상은 나발(螺髮)이 표현된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肉髻)가 놓여 있으나 얼굴은 코가 깨지고 마멸되어 세부 표정을 알아볼 수 없다. 다만 눈, 코, 입의 크기가 작고 이마도 좁게 표현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두 볼이 통통하면서 살이 있어 보인다. 목은 짧은 편으로 어깨와 거의 붙은 듯 위축되어 있고 가슴 또한 넓지만 양감이 줄어든 모습이다. 몸에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치고 있으며 양쪽 소매와 결가부좌한 두 다리 위에는 일률적으로 표현된 평행의 굵은 옷주름선이 보인다.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는데 왼손으로 오른손의 둘째손가락을 감싸고 있어 일반적인 지권인 형태와는 다르게 손의 좌우가 바뀌어 있다. 지권인은 주로 비로자나불상이 취하는 손모양이다.

홍천 물걸리 비로자나불상과 같이 두 손의 위치가 반대로 되어 있는 좌권인(左拳印)의 비로자나불상은 중국 시안(西安) 베이린박물관(碑林博物館) 회랑에 전시중인 당대(唐代) 9세기 비상(碑像)에 조각된 불상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비로자나불상 중에 다수의 예가 알려져 있는데,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하여 경북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사암제 비로자나불상과 경상남도 진양군 한산사 석조비로자나불상, 밀양 천황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등 대부분 9세기경에 조성된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이다. 홍천 물걸리 불상이나 천황사 불상, 증심사 불상과 같은 좌권인상은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얹어 놓은 항마좌(降魔坐)를 하고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비로자나불상은 오른쪽 다리를 위에 올려놓은 길상좌(吉祥坐)를 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항마좌의 비로자나불상은 3예에 불과하지만 모두 좌권인을 하고 있어 손의 위치와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 물걸사지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로 구성된 팔각연화좌로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대좌형식이다. 하대는 복판복련(複瓣覆蓮)을 8엽으로 돌렸으며 그 위로 2단의 굄이 중대를 받치고 있다. 8각의 중대석에는 모서리마다 우주(隅柱)를 새기고 그 사이 각 면에는 향로 1개와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공양상(供養像) 2구, 불입상 5구를 조각하여 장엄화하였다. 상대는 반구형의 앙련(仰蓮)을 2단으로 새겼으며 각 연판문에는 다양한 꽃문양을 장식하여 섬세하면서 화려한 느낌을 준다.

 

                      ▲ 물걸사지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대좌의 상대석과 중대석의 조각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전반적으로 긴장감이 줄어들었으며 원만한 얼굴이나 약간 위축된 신체표현, 무겁게 처리된 형식화된 옷주름 표현, 3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 등에서 9세기경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2003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이 석조비로자나불상은 금당의 본존불로 좌우에 석가불(釋迦佛)과 노사나불(盧舍那佛 또는 阿彌陀佛)을 배치한 삼신불(三身佛)이며 대적광전(大寂光殿)에 안치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때 하대석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받침대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각 면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 사자(獅子)가 1구씩 배치되어 있다. 크기나 형태, 특징으로 볼 때 석조비로자나불상 대좌의 하대 받침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6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사할 때 절터 주변에서 소량의 철불 파편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우협시 즉 노사나불은 철불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따라서 홍천 물걸리 불상은 우리나라 삼신불로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예에 해당되며 석불과 철불이 함께 구성된 삼신불이라는 점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8세기 불상에 비해 양감이 없는 평판적인 신체, 긴장감이 사라진 무겁고 해이한 옷주름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洪川 物傑里 石造臺座) 】

*보물 제543호(1971년07월07일 지정)

*대좌: 높이 93.5㎝, 너비 98㎝

 

 

대좌 위에 광배만 놓여 있는 것으로 현재 광배 윗부분과 왼쪽 일부가 파손된 상태이며 불상도 남아 있지 않다. 근래에 지은 전각 안에 석조대좌와 함께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등이 안치되어 있다.

 

 

                      ▲ 물걸사지의 석조대좌(사진 上)

                         석조대좌 하대 복련문과 지대석 안상내의 가릉빈가 조각(사진 下)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의 3단으로 구성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연화대좌 형식이다. 하대는 안상(眼象)이 새겨진 팔각의 받침대 위에 복련석(覆蓮石)이 놓여 있다. 안상 안에는 향로 1개와 가릉빈가(迦陵頻伽) 7구가 조각되어 있다. 받침대 위에는 복판중엽(複瓣重葉)의 복련을 8엽으로 돌렸으며 연판의 끝부분만 살짝 외반되어 있다. 그 위로 2단의 굄이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 역시 8각으로 각 면에 우주(隅柱) 2개를 새기고 그 안에 뚜렷하지는 않지만 원형의 광배를 갖추고 있는 8구의 신장상(神將像)을 각각 조각하였다. 상대는 반구형의 단판앙련(單瓣仰蓮)을 3단으로 돌렸으며 각 연판 안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어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대좌 형식은 9세기의 통일신라 후기에 크게 유행하였던 것으로 예천 청룡사 석불좌상이나 선산 해평동 석불좌상, 경북대학교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에서 볼 수 있다. 다만 하대석의 안상 안에 새겨진 문양이나 중대석 각 면에 조각된 상 등이 약간 다를 뿐 거의 공통된 특징을 보여준다.

 

 

                      ▲ 물걸사지의 석조대좌 위 광배(사진 上)

                         석조대좌 위 광배 바깥 부분의 불꽃무늬(사진 下)

 

광배는 현재 남아 있는 형태에서 볼 때 배 모양의 주형광배로(舟形光背)로 보이며 2줄의 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구분하고 내외에는 보상당초문과 화염문 등으로 장식하였다. 두광 안쪽으로는 연화문과 보상당초문이 일부 남아 있으나 신광에는 아무런 문양도 장식되어 있지 없다.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는 함께 안치되어 있는 석조불상 2구와 석조대좌 및 광배 등의 대좌형식과 세부표현에서 약간 차이가 있으나 거의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인 9세기경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 및 광베(洪川 物傑里 石造臺座 및 光背) 】

*보물 제544호(1971년07월07일 지정)

*대좌: 높이 106㎝, 너비 92㎝

*광배: 높이 187㎝, 너비 128㎝

 

 

팔각의 연화대좌 위에 배모양의 주형광배(舟形光背)가 놓여 있는 것으로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나 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었던 불상은 없어진 상태이다. 1967년 이 절터를 신축공사할 때 금동불상 1점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당시 절터 주변은 논과 밭으로 경작 중이었으며 주위에서 많은 와편들이 수습되었다. 현재는 1982년에 새로 지은 전각 안에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보물 제543호)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 팔각연화대좌 전체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연화대좌로 상대, 중대, 하대의 3단으로 구성되었다. 하대는 팔각의 받침대와 복련석(覆蓮石)으로 이루어졌는데, 받침대에는 각 면에 아무런 문양이 장식되지 않은 안상(眼象)만 새겨져 있다. 복련은 복판중엽(複瓣重葉)으로 8엽을 돌렸으며 각 모서리마다 귀꽃이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는 2단의 굄이 8각의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 역시 각 면에 감(龕)을 얕게 파고 그 안에 8구의 신장상(神將像) 등을 조각하여 장엄화하였다. 상대는 단판앙련(單瓣仰蓮)을 2단으로 쌓아 올렸으며 각 연판 안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어 화려하고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이러한 대좌 형식은 9세기의 통일신라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과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에서 볼 수 있다.

 

                      ▲ 광배

 

광배는 불상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주형의 거신광(擧身光) 형태로 되어 있는데 그 안쪽에 2줄의 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다시 구획하였다. 두광은 중앙에 활짝 핀 연꽃과 같은 연화문으로 표현한 데 반하여 신광에는 아무런 문양도 시문하지 않았다. 두광과 신광 안쪽에는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으로 장식하고 바깥쪽에는 화염문(火焰文)을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광배 정상에는 화불(化佛) 1구가 조각되었고 그 아래로 좌우에 화불 8구가 서로 마주보게끔 배치되어 있다. 9구의 화불은 원형의 신광과 두광을 갖추고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 거의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지만 손의 형태가 합장인(合掌印), 선정인(禪定印), 여원인(與願印) 등을 하고 있어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이러한 광배 형식 역시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하여 영주 북지리 석조불좌상, 괴산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 9세기경 통일신라 후기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다.

 

                      ▲ 광배 상단부 화불과 꽃무늬 장식(사진 左)

                         광배 중앙 신광부와 화불(사진 右)

 

홍천 물걸리 대좌 및 광배는 양식적으로 볼 때 한 짝으로 조성되었으며 전각에 함께 안치되어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상과 석조여래좌상, 석조대좌와도 대좌 형식이나 특징이 거의 유사하여 같은 시기인 9세기경의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홍천 물걸리 삼층석탑(洪川 物傑里 三層石塔) 】

*보물 제545호(1971년07월07일 지정)

*높이 4.01m

 

 

석탑은 법당터 앞에 서 있는데, 지금의 자리가 원래의 위치로 보인다. 1975년에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을 보수하였다. 석탑은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를 올리고, 꼭대기에 상륜부(相輪部)를 장식한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 삼층석탑 기단부

 

여러 장의 널돌로 이루어진 바닥돌 위에 아래층 받침돌을 올렸다. 여러 장의 널돌로 구성된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이 조각되었으며, 아래 부분에는 굽이 돌려져 있다. 덮개돌 역시 여러 장의 널돌로 결구(結構)하였는데, 윗면은 경사가 뚜렷하여 네 귀퉁이의 합각(合角)이 분명하고, 맨 윗부분에는 높고 둥글고 굄과 낮고 각진 굄이 함께 새겨져 있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은 4장의 널돌로 조립되었는데, 2장의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함께 1개의 가운데 기둥이 조각되었고, 다른 2장의 면석에는 가운데 기둥 1개만이 돋을새김되었다. 널찍한 1장의 널돌을 올린 덮개돌에는 밑면에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마련되어 있고, 가파른 경사를 이룬 윗면에는 네 귀퉁이의 합각이 뚜렷하면서 둥글고 높은 굄과 함께 각지고 낮은 굄이 새겨져 있다.

 

                      ▲ 삼층석탑 탑신부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각 층의 몸돌에는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낙수면인 윗면이 평박(平薄)하면서 합각의 선이 예리한데,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에 반전(反轉)이 있기에 합각의 끝부분도 반전되어 경쾌하게 보인다. 윗면에는 2단의 낮은 굄이있고, 밑면의 받침은 1층과 2층이 5단이지만 3층만은 4단으로 줄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에는 하나의 돌로 만든 노반(露盤)만 남아 있는데, 윗부분에 부연이 새겨져 있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일반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받침돌의 가운데 기둥 수가 줄어 들었고, 특히 3층 지붕돌의 밑면 받침이 1∼2층과 달라 규율성을 잃고 있다. 따라서 건립 시기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