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전남 강진)마음의 평화를 얻는 곳. 천년고찰! 강진 무위사

왕마구리 2015. 12. 9. 19:07

◀ 전남 강진 무위사(華嚴寺) ▶

마음의 평화를 얻는 곳!!

천년고찰 관음기도도량!!!

 

                      ▲ 무위사 전경

 

「 전남 강진(全南 康津) 소개 」

강진군은 원래 백제시대의 도무군지역인 도강과 동음현 지역인 탐진이 영합된 지역으로 도강의 “강”자와 탐진의 “진”자를 합하여 강진이라 호칭되어 온 것으로써, 도강군은 백제시대에는 도무군,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도무군이 양무군으로, 동음현이 탐진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조에 도강군으로 개칭과 동시에 탐진현 일부지역이 영암군과 장흥군에 속하다가 명종 2년(1172) 이 곳에 감무를 두어 행정, 병무를 동시 담당토록 하였다.

조선조 태종 17년(1417) 도강현 지역의 일부인 현 병영면 지역에 전라도병영(병영 절제사)을 신설함과 동시에 동강현과 탐진현을 합하여 이 곳을 강진현이라 명명하였으며, 그 치소를 도강의 치소이던 송계(현 강진읍 송현 또는 성전면 수양지역)로 옮겼으나 조선조 성종 6년(1475)에 다시 탐진의 치소(현 강진읍)로 복귀하였다.

조선조 개국 503년(1895)에는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강진군으로 개칭하고, 1914년에 백도면(현 신전면과 해남군 북일면의 일부)의 월성, 항리, 만수, 좌일, 금당, 내봉, 동리, 중산, 방책, 남촌 등 10개리를 해남군 북평면에 이속시키는 동시에 완도군 관할이던 가우도를 우리 군 도암면에 영속시켰다.

1936년 7월 1일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도암면 남부의 7개리를 분할하여 신전 출장소를 설치하였고, 도암면 영파리를 강진읍에 편입하였다. 서기 1974년 10월 26일 도암면 신전출장소를 군 출장소로 승격된 후 1983년 2월 15일 면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1981년 9월 25일 마량출장소를 설치(1982년 2월 10일 개소)한 후 1989년 4월 1일 마량출장소가 마량면으로 승격되었고, 1990년 8월 1일 해남군 옥천면 봉황리 일원이 도암면으로 편입되어 헌재 우리 군의 행정구역은 1읍, 10개면, 112개 법정리, 287개 행정리, 292개 자연마을로 되어 있으며 약 5만 여명에 달하는 인구가 오순도순 정답게 살고 있다.

 

                      ▲ 극락보전 앞에서 바라본 무위사 경내 전경

                      ▲ 무위사 경내로 들어서는 일주문인 해탈문

 

『 탐방한 강진군의 문화재들 』

● 강진 무위사

국보 제13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국보 제313호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康津 無爲寺 極樂殿 阿彌陀如來三尊壁畵)

보물 제507호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보물 제1312호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 (康津 無爲寺 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314호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 (無爲寺 極樂殿 白衣觀音圖)

보물 제1315호 무위사 극락전 내벽사면벽화 (無爲寺 極樂殿 內壁四面壁畵)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무위사 삼층석탑 (無爲寺 三層石塔)

● 강진 월남사지

보물 제298호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康津 月南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313호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康津 月南寺址 眞覺國師碑)

전라남도 기념물 제125호 월남사지 (月南寺址)

●강진 금곡사(金谷寺)

보물 제829호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 (康津 金谷寺 三層石塔)

●강진 정약용 유적(康津 丁若鏞 遺蹟) 사적 제107호

사의재(四宜齋)

다산초당(茶山草堂)

백련사(白蓮寺)

보물 제1396호 강진 백련사 사적비 (康津 白蓮寺 事蹟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백련사 대웅전 (白蓮寺 大雄殿)

천연기념물 제151호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康津 白蓮寺 동백나무 숲)

●강진 전라병영성 (康津 全羅兵營城) 사적 제397호

 

【 일 정 표 】2015년 11월 2일(월)-3일(화) 1박2일

                             ◈ 첫째날(11/2) : (영암)도갑사-(강진)무위사-월남사지

                             ◈ 둘째날(11/3) : 사의재-백련사-다산초당-금곡사-강진 전라병영성

 

전라남도 강진 여행은 월출산국립공원 내에 소재한 영암의 도갑사 방문을 겸하여 실시한 여행이었다.

강진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영암의 도갑사를 먼저 탐방하고, 본격적인 강진지역의 문화재 탐방이 이루어졌으며,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만덕산 숲탐방로(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인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약 1km의 숲길)도 백련사와 다산초당 탐방시 함께 탐방을 하였다.

만덕산 숲탐방로는 강진 정약용유적 편에 사의재, 다산초당과 함께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소개를 하기로 하며, 영암의 도갑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별도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또 다른 강진의 탐방지들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강진 전라병영성'을, '무위사','월남사지'와 '백련사', 그리고 '금곡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각 사찰별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 마음의 평화를 얻는 곳. 쳔년고찰! 강진 무위사(無爲寺)

- 신라계 양식의 석탑 흔적이 남아 있는 절터! 강진 월남사지(月南寺址)

- 고려8국사와 조선8종사의 숨결이 들리는 곳! 련사(白蓮寺)

- 한국 사상의 원형! 다산의 사상이 완성된 유배지! 강진 정약용 유적 (康津 丁若鏞 遺蹟)

- 임진왜란 승병의 훈련장! 금곡사(金谷寺)

- 민족저항 정신의 산 증거! 강진 전라병영성 (康津 全羅兵營城)

 

 

 

                      ▲ 해탈문(사진 上左)과 사천왕문(사진 上右)

                         보제루에서 뒤돌아 본 사천왕문과 해탈문(사진 中)

                         사천왕문을 통해 본 해탈문(사진 下)

 

『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소개 』

「 무위사사적 」을 보면 통일신라 헌강왕1년(875) 도선국사가 창건하였으며,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효공왕 9) 이후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계통의 선각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한다. 따라서 무위사는 형미 스님이 주석했던 10세기 초 이전에 무위갑사라는 절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위사사적>에 의하면 고려시대인 946년(정종 1)에 형미가 제3창을 하면서 모옥사(茅屋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946년은 이미 형미가 입적한 30년 뒤에 최언위가 지은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가 세워진 해라서 믿기 어렵다. 이것은 아마 형미가 모옥9茅屋)이던 무위갑사를 왕건의 후원을 받아 크게 중창하면서 교화를 펼쳤던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무위사는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었고, 형미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

 

 

절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가지 활동 기록이 보여지는 등 자못 활기를 띠고 있어 주목된다. 나라에서는 1407년(태종 7) 12월에 각처의 명찰로 여러고을의 자복사(資福寺)를 삼게 하였는데, 이 때 무위사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로 소속되었다. 이것은 무위사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선종 사찰에서 천태종 사찰로 그 성격이 변동되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같은 사격의 변동은 고려후기의 천태종 백련결사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만덕산 중심의 백련결사(白蓮結社)도 천태종의 법화신앙에 입각한 결사운동으로 무위사의 사찰 성격 변동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믿어진다. 결국 무위사는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했던 고려후기에 이미 천태종 소속의 사찰이 되었다가 조선 초기 사찰통폐합의 2차정리기인 1407년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남게 된 듯하다.

이 무렵의 연혁을 보면 1430년(세종 12)에 극락보전이 건립되었는데 지금 극락보전 안에 모셔진 목조 아미타삼존불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476년(성종 7)에는 극락보전 후불벽이 만들어졌고 후불벽화가 조성되었음이 <무위사극락보전묵서명(無爲寺極樂殿墨書銘)>으로 확인된다. 이 묵서명을 보면 극락보전 건립에 관직을 부여받은 승려들이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곧 극락전 건립이 조선 초기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던 고급 기술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임과 함께 국가적인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7 <강진현 불우조>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했던 무위사를 이제 중수하고 이로 인해 수륙사(水陸社)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 미륵전(사진 左), 산신각(사진 中) 그리고 나한전(사진 右)

 

                      ▲ 무위사 종무소와 요사채 주변의 전경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보전의 건립, 아미타삼존도 · 아미타여래도등의 벽화 조성은 그 조성 시기 및 신앙 배경 등에 있어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왜냐하면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는 수륙재(水陸齎)를 빈번하게 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재생 의식으로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죽은 영혼을 달래려는 수륙재는 곧 살아 있는 자들의 애도와 복수심가지 포용하려는 차원에서 거행된 불교 의식인 것이다.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극락보전이 건립되고 아미타불의 벽화가 조성되는 것은 이와 같은 신앙 구조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 여겨진다.

한편 <무위사사적>에 따르면 1555년9명종 10년)에 태감(太甘) 스님이 4창하고 무위사로 개칭했다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무위사란 절 이름이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407(태종 7)에 이미 나타나고 있어 <무위사사적>의 이 부분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잰왜란 · 병자호란 두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절은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아 절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일도(一道)에 으뜸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점차 법당과 요사가 훼손되어져 몇 개의 전각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에는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괘불석주가 제작되었다. 1739년 (영조 15)에 해초(海超) 스님의 공덕으로 전각이 보수되었는데 당시 미타전· 천불전 · 시왕전이 있었다. 당시의 주지는 극잠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절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극락보전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해방 이후 1956년에 극락보전을 수리 보수하고 1975년 벽화보존각을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했다. 1975년에는 편광영탑비와 사리탑 등에 대한 정화 불사에 이어 봉향각 · 해탈문 · 명부전 · 천불전을 다시 짓고 1991년에 산신각을 1995년에는 이미 있던 동쪽 요사를 늘려 지었다.

 

① 극락보전 ② 미륵전 ③ 산신각 ④ 천불전 ⑤ 선각대사편광탑비 ⑥ 3층석탑 ⑦ 벽화보존관 ⑧ 종각 ⑨ 해탈문 ⑩ 안내판 ⑪ 화장실 ⑫ 불교용품 판매점 ⑬ 종무소 ⑭ 화장실 ⑮ 요사체 16.우물 17.요사체 18.명부전

 

♧ ♧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국보 제13호( 1962년12월20일 지정)

*소재지: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무위사로 308, 무위사 (월하리)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 절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무위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보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 극락보전 공포들 

                      ▲ 극락보전 측면 처마와 공포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 극락보전 내부 전경(사진 上)

                         극락보전 내부 천장 용문(사진 下)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

 

                      ▲ 극락보전과 삼층석탑

 

【 무위사 벽화 】

아미타여래삼존벽화와 수월관음도는 극락보전에 있고, 나머지 27점의 벽화는 보존각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 ♧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康津 無爲寺 極樂殿 阿彌陀如來三尊壁畵)

*국보 제313호(2009년09월02일.지정)

*소재지: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94번지

흙벽에 채색. 210 × 270 cm. 1476년 작품. 극락보전 후불벽 앞면에 그려져 있는 아미타삼존불벽화이며, 후불벽화로 그리기 위하여 따로 세워진 벽면에 그려졌다.

구도는 앉은 모습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앞의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뒤쪽으로 화면의 맨 위부분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좌우에 각각 3인씩 6명의 나한(羅漢)을 배치하였으며 그 위에는 작은 화불이 2구씩이 그려져 있다. 원근감을 표현하였으나 상하로 구분하는 2단구조의 고려 불화나 16세기의 조선 불화와도 다른 것이다.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을 그린 이 벽화는 앞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비교적 높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뒤로는 키모양의 광배가 표현되었다. 광배(光背)의 모양은 키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15세기부터 사용되었다. 착의법(着衣法)은 고려 후기의 단아양식(端雅樣式)을 계승한 것이며, 가슴 아래까지 올라온 군의(裙衣)의 상단을 주름잡아 고정시킨 매듭끈을 대좌(臺座) 좌우로 길게 드리운 것은 조선 초기의 특징이다.

 

 

왼쪽에 서있는 관음보살은 머리칼이 어깨 위에 흘러내린 모습에 얇고 투명한 겉옷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오른손으로 석장을 짚고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채색은 주로 녹색과 붉은 색을 사용하였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조선 성종 7년(1476)에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등 수십명의 시주로 화원 대선사 해련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화는 온화한 색채나 신체의 표현 등 고려시대의 특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간결한 무늬나 본존불과 같은 크기의 기타 인물 표현 등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無爲寺 極樂殿 白衣觀音圖)

*보물 제1314호(2001.08.03.지정)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의 뒷면 그림으로,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이다.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씌어져 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자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보살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 성종 7년(1476)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앞면의 아미타후불벽화와 더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 무위사 극락전 내벽사면벽화(無爲寺 極樂殿 內壁四面壁畵)

*보물 제1315호(2001.08.03.지정)

*수량/면적 29점

극락보전 안쪽 벽에 그려진 벽화로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를 포함하여 총 29점이다. 지금은 모두 해체되어 보존각에 보관ㆍ진열되어 있다.

이 벽화는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 오불도 2점, 관음보살도를 비롯한 보살도 5점, 주악비천도 6점, 연화당초향로도 7점, 보상모란문도 5점, 당초문도 1점, 입불도 1점 등으로 극락보전 안쪽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삼존불화는 동쪽벽 중앙에 그려져 있던 그림으로, 가로로 긴 화면 가운데에 설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로는 서있는 모습의 보살상과 여섯 비구를 배치하였다. 배경으로는 바위산을 그려 넣었다. 본존불의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입고 있는 옷주름은 매우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아미타래영도는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아미타불을 그렸는데 8대 보살과 8비구를 거느린 모습이다. 전체적인 구도가 매우 자연스러우며, 인물의 익살스럽고 자유로운 얼굴 표정, 움직이는 듯한 자세 등 회화성이 돋보인다.

이들 벽화 중 삼존불화와 아미타래영도 2점과 15세기 추정의 관음보살도, 당초문도 2점 등 4점은 특히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극락보전 벽화 중 비천선인도

 

◈수월관음벽화

불벽(後佛壁) 뒷면에 그려진 수월관음벽화. 아미타삼존 후불벽화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두광(頭光)과 신광(神光)을 지고 선 수월관음이 관음보살을 예배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에는 아미타불이 묘사된 보관(寶冠)을 썼으며,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오른손에는 버들가지를 잡고 있다. 얼굴은 넓으며, 목은 굵고, 넓은 어깨가 강건함을 느끼게 한다. 주위에 물결을 묘사하여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천의(天衣) 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화면 전체에 표현된 파도의 곡선과 더불어 긴장감과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보통 선재동자의 모습은 작은 동자의 모습이지만 여기에서는 승복을 입은 노비구(老比丘)의 모습이다.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자세에서 구도자의 모습, 간구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후불벽화에 관한전설은 극락보전 건립 후 어느 날 노승 한사람이 사찰을 찾아와 벽화를 그리겠다며 100일동안 법당분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99일째 되던 날 궁금증이 많은 한 승려가 창살을 통해 법당안을 들여다보자 한 마리의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날아가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존 후불벽화 중 가장 오래된 무위사 후불벽화는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그려지지 못한 미완성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 극락보전 벽사면 벽화

                         관음보살(사진 上左), 대세지보살(사진 上右), 지장보살(사진 下左), 아미타여래(사진 下右)

 

◈아미타내영도

무위사 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는 벽화. 1476년 제작. 흙벽에 채색. 아미타불이 죽은 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도상화(圖像化)한 것으로 원래는 극락전 서측 벽면에 있었던 것을 1976년 극락전을 수리할 때 벽채로 떼어내어 보존각에 보존하였다. 내영도는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사자의례(死者儀禮)와 깊이 관련된 것이며, 한국에 전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구성된 것은 찾아보기 힘들고 감로탱화(甘露幀畵)라는 불화에서 내영의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감로탱화의 구도는 극락과 지옥을 대비시켜, 상단에는 극락을, 하단에는 지옥을 묘사한다. 그리고 내영의 모습도 아미타불 단독으로 맞이하는 것,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이 25보살과 함께 와서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과 성중(聖衆)이 맞이해 가는 것 등이 있다.

 

                      ▲ 극락보전 서벽의 아미타9존내영도

 

이 내영도는 아미타불이 8보살 및 8비구(比丘)와 함께 와서 맞이하는 극락내영도이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듯 오른손은 앞으로 내밀어 뻗고 왼손은 들어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둥근 육계(肉)에 중앙의 계주(珠)만 표현한 머리모양, 사각형의 얼굴에 눈꼬리가 길게 올라간 긴 눈, 구불구불한 옷자락의 표현은 고려 말 불화(佛畵)의 특징이며, 군의(裙衣)를 묶은 매듭끈을 법의 자락 앞으로 대칭시켜 늘어뜨린 것은 조선 초의 특징이다. 관음보살상은 보관(寶冠)에 화불(化佛)과 보병(寶甁)을 강조하였으며, 대세지보살은 정병(淨甁)과 경함(經函)을 들었고, 무릎 부근을 구슬로 장식하였다.

 

 

                      ▲ 극락보전 벽사면 벽화

                         야생화(사진 上), 해수관음보살(사진 下)

 

그 밖의 보살들도 제각기 특징있는 물건을 들고 있으며, 지장보살의 경우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두건을 쓰고 있는 점 등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벽화의 지장보살과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이러한 점은 이들 일련의 작품이 동일 작가에 의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보살들 위로 상체만 묘사된 8비구들은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여 전체 화면이 활기를 띤다. 화면 전체적으로 풍기는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은 고려 불화의 양식을 보여주며, 나한(羅漢)의 등장과 세부묘사에서는 조선 초기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보물 제507호(1969년06월16일 지정)

 

무위사는 전라남도 강진의 월출산 동남쪽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의 명승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라 하였고, 명종 5년(1550) 태감(太甘)이 4번째로 세우면서 무위사라 하였다. 이 탑비는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었다.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영탑’이라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높이 약 2.35m, 너비 1.12m.

무위사 극락보전 서쪽 약 30m에 위치하는데 돌로 쌓은 담장 안에 남향으로 있다.

비는 비받침과 비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받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 선각대사탑비 비몸돌

                      ▲ 용머리 형태의 탑비 귀두

                      ▲ 선각대사탑비 후면 귀부의 귀갑문과 비좌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 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 선각대사탑비 머릿돌의 장식

 

비제(碑題)는 ‘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 幷序’라고 시작하여 지은이 최언휘(崔彦)와 쓴이 유훈율(柳勳律)의 성명을 기록하였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의 크기는 2cm이고 해서체(楷書體)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 ♧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康津 無爲寺 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312호(2001년08월03일 지정)

 

 

극락보전 불단 위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가운데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본존불은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지닌 모습이다. 둥근 얼굴을 하고 가슴 부분은 약간 쳐진 듯 표현되었으며,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다. 이 아미타불은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이다.

 

                      ▲ 극락보전의 목조아미타여래삼존불좌상

                         左로 부터... 관음보살좌상, 본존인 아미타불좌상, 지장보살좌상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양식의 관음보살상은 왼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 놓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간단한 모양의 가슴장식이 있으며, 양어깨에 곱슬한 머리칼이 흘러내린 모습이다. 두손은 앞에 모아서 보병을 받쳐들고 있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지장보살상은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의 앞쪽에 흘러내린 옷주름은 아래 대좌에 표현되어 있어 불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 삼존불좌상은 고려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으로 변형되고 있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불상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인 작품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50㎝ 정도의 장대한 크기의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으로 조선 초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 무위사 삼층석탑(無爲寺 三層石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1984년02월29일 지정)

 

 

무위사 극락전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기단은 각 층의 4면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아래층은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위층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특히 아래층에는 기둥조각으로 나뉜 8곳에 안상(眼象)을 세밀하게 새겨 장식하였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얇고 평평해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쪽가에서 가볍게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세 개의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크기가 적당히 줄어들어 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으로, 비록 1층과 3층의 지붕돌이 약간 깨져 있긴 하나 대체로 원래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만든 시기는 뒤에 서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945년에 만들어짐)와 같은 때이거나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고려시대 전기일 것으로 추측된다.